| K309: 나를 콤퓨터 산업으로 이끈 사람들 |
우연찮게, 컴퓨터를 다루는 일을 소개받아서, 중국집과 일식집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것보다는, 나은 학생 알바라서, 시작을 했다가, 전문분야가 되어 버렸슴. 아주 묘한 인연이 되었슴. 한국에 있을 때에는, 콤퓨터와 나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뜻하지 않게 변했슴.
대학 1학년때, 나에게 SDSC 인턴을 소개해준, 백인 비서 아줌마는, 그후로 알게 되었지만, 아주 고지식하과 답답하고 우월감을 갖은, 백인 아줌마 였슴. 그후로 종종 학교에서 마주쳐도, 별로 반갑지도 않았고, 학교에 동양인 학생이 많아지는 것에, 엄청나게 싫어했고, 대놓고서, 학교에 불만을 토로했을 정도로, 아주 고지기하고 편견이 많은, 금발의 백인 아줌마였슴.
어쨌건 그 고지식한 백인 아줌마때문에, 지금까지 컴퓨터로 밥벌이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게 되었슴. 완전히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야하나, 정해주었다고 해야 하나...
그 당시에는, 수개월간 채우지 못했던 sdsc 의 학생인턴 자리를, 자신이 소개해서, 자리를 채웟기에, 성취감을 느끼는것 같았고, 그래서 , 나에게 친절하기도 하였지만, 동양인뿐 아니라, 백인이 아니면 싫어했던 그 아줌마의 엄청난 편견에, 내가 마음속으로는 엄청나게 고마워 했으면서도, 외형적으로는, 인종편견을 갖은 사람하고는, 좋게 못지낸다고, 대놓고서, 거부감을 표시해야만 했슴.
선물이나 카드라도 하나 보내고 싶었지만, 결코 보내지 못했슴.
한 십여년전에, 내가 다녔던 LA 지역의 대학은, 몇년단위로 재탐사를 하면서, 감상에 젔는데, 십여년전에 들러서, 캠퍼스 이곳저곳에 앉아서, 옛 생각도 하면서 있는데, 어떤 휠체어엔 탄 할머니가, 나보고서, 예전에 이 학교에 다니지 않았냐고 물어보기에, 돌아보니까, 바로 그 백인 아줌마.... 정말로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지만, 그 백인우월주의의 태도가 생각이 확 떠올라서, 감정을 누르고서, 나를 기억 하냐고 물으니까, 학생으로 본 기억이 난다고 하였슴.
내가 좀 특이하게 생겨서, 아주 오래되었어도 기억을 하는 사람이 많음 ;-)
전자과에서 비서로 일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50년을 전자과에서 비서등으로 일을 하다가, 은퇴를 했다고 함. 90이 넘어서, 인생의 마지막으로 학교 구경을 왔다고 하는데 ------- 정말로 반갑고 좋은말만 해주어야 했을 백인 아줌마이지만, 너무도 인종편파적인 행동을 많이 보아서, 결코 고맙다는 말을 전혀 못하고 말았슴. 내 인생의 흐름을 완전히 바꾼 백인 아줌마였슴. 만약 내가 컴퓨터라는 기술이 없이, 수학을 공부했다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임.
정말로 고맙다고 해야할 사람에게, 어떤 이유에서건, 고맙다는 말을 못해서, 내 맘속에 큰 빚이 남아있는 것같이 때대로 무거움. 하지만 정말로 직접 마주치면,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않나왔슴.
그외에도, 나를 콤퓨터를 직업으로 갖게한 여러 사람은, 종종 소개를 하였었슴. 난 아직도 옛 생각에 감상에 젖어서, 더 토론이 힘들고, 왠지 센치멘탈해짐. 하루를 감상에 젖어있다가, 계속 이어감.
1982년부터 컴퓨터로 밥벌이를 시작하고서, 갈수록 더 전문화가 되었지만, 아주 큰 매력은 못 느꼈고, 돈벌이에 가성비가 좋다는 생각만 하였다가, 1988-89년경, 물리학에 컴퓨터 computing 을 응용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computer computing 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때 부터는, 돈벌기 쉽다는 생각은 않하고, 연구하려는 물리학의 분야와 computing 의 조화가, 아주 적절해서, 몹시 아름답게 조합을 이루어서 결과를 내는것에 완전히 빠졌었슴.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데, 종종 과학자중에, 문제를 풀면서, 아름답다는 표현을 하고, 나도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면서는, 그런 아름답다는 말을 하는 교수들을 이해를 못했다가, 컴퓨터로 computing 을 하면서,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고, computing 이라는 새로운 경지에서 , 콤퓨터를 다루기 시작했씀. 그냥 차가운 기계가 아님. 이런 주제로 토론을 할 날이 오려나? 물론 computing 을 토론하는 토론방에서는, 아주 활발하게 토론을 하는데, 수학자나, 이론 물리학자가 아니면, 결코 이해를 할수가 없는 분야임.
그후로 여러번의 응용의 분야가 바뀌었고, Wall 가에서 투자분석가로 일을 하면서, 실물경제를 분석하는,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Wall 가 입성한, 나도 첫번째의 수물리학자 그룹이 되었고, 건축을 하면서도, drafting table 에서 하던 도면그리기를, CAD로 옮겨가는 전환시기에, 큰 역활도 하면서, 지진이나 내부 안전 공사 확인을 하는, 토목공학세어 사용을 하는, 여러가지 지진등의 simulation 소프트웨어를 더 활성화 시키면서, 건축도면과 연계를 시키는 프로그램 개발도 하였슴.
그 후로 몇번의 삶의 방향을 바꾼후에, 버클리 대학원으로 돌아갔는데, 1993-4년겨울인가, 신문광고에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에 파트타임 프로그래머를 뽑는 구인기사가 나왔고, 그래서 San Jose 로 찾아갔는데, 그 사장이 Gupta 라는 인도사람인데, 내가 원했던 자리는 다른 사람이 벌써 차지했는데, 나의 컴퓨터 배경을 물어보더니, database engineer 를 하라고 했는데, 난 전혀 관심이 없었고, 아는것도 없었는데, 내가 잘 할수 있을 것이라고, 너무도 강력하게 나를 추켜 세우면서 권하기에, 일단은 해보자 하게 되었슴.
그러면서 어느 한 DB sw 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보편화 되었던, Oracle, Sybase, MS SQL, Ingres 등 7-8가지의 상업용 DB sw 를 , 다른 팀에서는 전담 엔지니어 1-2명씩 담당하고, 나는 그 모든 DB를 전체적으로 관리하고, 서로가 data 를 공유할수 있게 하는 역활이었슴. 일단은 기본적인 각 db를 하나씩 익힌후에, 서로가 communicate 을 하게 하여서, 어느 db sw에서 db 를 만들었건, 다른 db에서도 다 사용을 할수있게 modify 하는 것이었슴. 처음엔 조금 힘들었으나, 몇달내로 아주 잘하게 되었고, 나도 놀랄정도로 아주 잘했고, Gupta 씨도, 예상보다 훨씬 더 잘한다고 놀랐슴.
IT SI, System Integration 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database 관리라는, IT 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체험하게 되었슴. 그래서 나도 주위에서 한참 바람이 불고 있던, IT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슴.
물론 그당시는 버클리 수학과 대학원생 이라서, 어떻게든 AI/VR을 컴퓨터를 사용해서 구현해 보려고 하였기에, 학교에서는, 컴퓨터 응용 수학자였슴.
그리고 그해 여름에, 어떤 여름 인턴을 할까 하는데, Lawrence Livermore 국립연구소를 소개 받았슴. 버클리에서 리버모어까지는, 가는데 자동차로만 1시간, 왕복 2시간을 운전을 해서, 오가기에는 부담이 되었지만, 일단은 Livermore 구경도 갈겸, 인터뷰를 갔슴.
인턴 담당을 하는, 아주 아리따운 금발의 아줌마가, 나의 배경을 듣더니, SI 관련 자리가 적성이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System Integration 이라는 용어는 많이 들었어도, 실제로 어떤일을 하는지는 잘 몰랐었슴. 난 그간 특정한 분야로의 응용만 하였지, 전반적인 시스템통합은 생각해본적도 없었고, 또 새로운 분야로 들어가기도 꺼렸섰슴.
근데 너무도 친절하게, 나에게 SI 관리자르 하면 된다고 하면서, 여러권의 관련 책들도 빌려서 주고, 물론, 임금도 학생인턴이 아닌, student-staff 로, 학생 인턴의 2배로 준다고 하였슴.
UC Berkeley가 Lawrence Berkeley Lab 과 Lawrence Livermore Lab 을 국가를 대신해서 운영을 하고 있었기에, 버클리대학교와 리버모어 연구소는 같은 소속. 그래서 내가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버클리에 학생을 적을 두고 있었기에, 버클리 연구소나, 리버모어 연구소나,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에서 일을 하여도, student, 학생, 이라는 타이틀과 제한은 뺄수가 없었는데, 그대신 경험을 인정해 주어서, pay 는 자리에 따라서, 학생인턴의 2배, 3배, 4배로 다르게 주었슴.
너무 친절했던 백인 아줌마때문에 쉽게 , No 라고 못하고서, 집으로 와서, 빌려온 여러권의 책을 읽는데, 단 하루만에 다 읽어서, 이해를 하였슴. 간단히 말하면, bird's eye view 로 전체적으로 컴퓨터 시스템을 보고서, 운영을 하는것이지, 즉 나무숲 전체를 보는것이지, 그전처럼 숲속의 나무 하나 , 하나를 보는것이 아니었슴.
즉 그동안 사용했던 모든 컴퓨터 관련 지식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새로운 관점에서 , 전반적인 컴퓨터 시스템을 다루는 것이었슴. 새로이 배워야 할것은, 새로운 시각이고 관점이고 방법이었고, 기술적으로는 새로이 배울것은 없었슴.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과 응용을 안해본 SI engineer 라면, 두가지를 동시에 배워야 하기에 힘들겟지만, 난 SI 의 관점에서만 보면 되었기에, 별 어려움없이, 쉽게 적응을 하였슴.
여러가지 사정상 10주의 과정은 못 채우고, 8주만 하고서 끝났는데, 내가 빨리 인턴과정을 마칠때, 그 백인 아줌마는 휴가를 갔기에, 고맙다는 말을 할 기회가 없었슴. 그
후로, 난 SI 로 입문을 해서, 지금도 IT, 에서도, SI 를 한다고 함.
그러고서, 6개월후나, 1년후나, 2-3년후에도, 그 백인 아줌마를 찾아가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리버모어연구소는 국방부 프로젝트를 하는 곳이라서, 내부 직원이 초대를 하지 않는한은, 운동장에도 들어가지를 못하는데, 들어가야 그 관리자 아줌마를 만날수가 있지, 밖에서 먼저 연락할 방법이 없었슴. 그래서 나를 IT SI 로 인도해준, 그 백인 아줌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혀 할 기회가 없었슴.
또한 ,Mr Gupta 씨의 강요된 database 공부를 하면서, SI 입문의 기초를 닦았는데, 봄 학기를 파트타임으로 일을 한후에 찾아가니, 그 지역이 재개발로 다 헐려서,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알수가 없게 되었슴. 굽타씨에게도,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못했슴.
굽타씨와 리버모어연구소의 그 백인 아줌마 , 두 사람 때문에, 내가 IT Si로 입문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몹시 자주 햇슴. 교수나 학자나, 친구나 선후배가 아니었슴.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는데, 처음 만나자마자, 나를 강요하듯이, ... 너 이거 잘할수 있어... 하면서, 하게 하였고, 그것이 나의 적성에도 맞았슴.
그런 인연이 진짜로 귀중한 인연인데, 그후로 연락을 다시 못하고 있으니.... 물론 굽타씨나 리버모어연구소에서, 나의 경험에 비하여, 아주 헐값으로 고용을 한것은 사실이지만, 대학원에 다니면서 , 제 임금을 받으면서 일을 할수있는
파트타임 직장을 찾는것은, 정말로 힘들었고, 임금이 어떠 하였건, 난 내가 맘 편히 일을 할수 있는 분야로 입문할수 있게, 소개를 해준 기회를 제공한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좀더 싸게 일을 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슴. 좋은 기회란 것은, 돈을 내면서라도 찾아야 하는데, 얼마건 돈을 받으면서, 일을 했기에, 그 당시에도 불만은 없엇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1994년 겨울-봄-여름에 이르는 시기에, IT SI 로 점진적으로 입문을 하게 되었슴.
그래서 학생이라는 타이틀의 제한을 벗어나자, 이사나 부사장급으로 , 확 뛰어서 회사에서 일을 하였기에, 즉 최하위 중역이라도 중역부터 일을 다시 시작햇지, 부장급도 하지 않아서, 회사 생활을 엄청나게 편하게 해서, 아래 직원의 힘든점을 잘 이해 못한다는 , 불평도 자주 받았슴.
computer 는 기계일뿐, 사람이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냄. 그런 기본적인 것을 모르고서, 컴퓨터가 어떻게 저저로 해주겟지 하는 사람이 너무 많음. 그래서 영어로, Garbage In, Garbage Out (쓰레기 입고, 쓰레기 출고) 이라는 문구를 ,컴퓨터 분야에서는 , 엄청나게 자주 사용함. 아무리 크게 모욕을 느끼더라도, 앞에서 대놓고서 말할정도. (옆에서 지켜보고 잇으면, 나중에 권총을 가져와서, 쏠까봐 겂이 날 정도인데, 아직 내앞에서는 , 그런 일은 없었슴. 물론 난 대놓고서, 그런말을 한적은 없었고, 들은적도 없었슴).
과학계에서는 콤퓨터를 많이 응용한 연구를 하게되면, computation 이라는 타이틀을 부침. Computational Particle Physicist. Computation Mathematician, Computational Physical Chemist 같이 칭하는데, 아직도 확립된 분야는 아님.
이번 토론에서는, 실제로는 5일에 걸친 토론을, 녹취록을 정리해서, 하나로 뽑은 것인데, 좋은 대학에 입학했기에, 그런게 나에게 , 본인들은 별로 느끼지 못했겟지만, 나의 학문적이고, 직업적인 방향을 바꾸었거나, 다른 곳으로 갈수있게 인도해준, 사람들을 만날수가 있었슴. 그냥 일반인 이었던 교직원 그들이었지만, 어떤 교수나, 학자나 친구들보다도, 더 깊게 학생의 인생에 영향을 주었슴.
그저그런 대학에 입학을 햇었다면, 패배주의에 빠져있는 교수나, 학생이나, 교직원들 때문에, 큰 자극을 받기는 힘들엇을 것임. 명문대학 입학이 전부가 아님. 제대로 여러 사람으로 부터 배워서, 막말로 뽕을 뽀방야함. 명문대학 간판 하나만 , 남아서는 않됨.
근데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할 기회가 없던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움.
그리고 다시 생각해봄, 나 때문에, 내가 학생시절 받았던 자극을 받은, 주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몇명만 있더라도, 나의 인생은 더욱 가치가 있을수도 있는데.....
---
내가 sdsc 에 인턴으로 들어갔을때는, 학부 1학년, 아무런 경험도 없는데, 일본인 교수가, 나를 아주 좋게 보아서, 인턴으로 입사가 가능했슴. 공식적으로 연구소를 열기전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 난 인턴으로 들어갔기에, 창립멤버라는 명예도 있었는데, 정식 직원들은, 학부 1학년 학생을 인정해 주려고 하지 않았슴.
이름에서 연구소는 San Diego 에 있었고, 나는 Los Angeles 에 있어서, 자동차로 2-3시간 걸리는데, 학교에 다니면서 어떻게 출퇴근을 하였냐고?
그 당시는, keypunch 로 프로그램을 짜고, arpanet 으로 통신을 하던 시절. internet 이라는 것은, 개발도 되기전.
그래서 , 인공위성을 통해서, arpanet 으로 샌디에고의 연구실로, remote login 을 하면서, 인턴 역활을 하였슴. 각자가 자세한 환경을 알아보도록.
supercom 이나 mincom 이 막 개발되어서, 퍼지기 시작할 무렵이라서, 새로운 기계가 나올때만, 아주 두꺼운 manual 이 있고, 고참 교수나 staff 들은, 그 두꺼운 manual 을 읽어서, 이해를 하여서,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기가 힘들다보니, 동무을 받아야 했고, 그래서 많은 학생인턴을 두었는데, 별로 실용적이 않되었슴.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역활도, 두꺼운 user manual 을 읽어서, 간편하게 요약을 해서, 교수와 staff 들이 쉽게 이해를 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슴.
나야 그당시 하교밖에서 알바를 할때, 중국집이나 일식집에서, 웨이터로 일하면서, 음식주문받고, 먹은 그릇 치우는 일외에는, 할수 있는 일이 없었는데, 에어콘 잘 나오는, 학교의 연구실에서 독자적이 책상이 있고, 아주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user manual 을 읽으면서, 돈을 받으니, 너무도 좋은 알바잡이었슴. 그리고 학생 인턴으로 일을 한다고, 다녔던 학교에서도, 준-staff 대우를 해주어서, 일을 하기도 아주 편했씀.
수십 page 짜리 manual 을 읽어서, 몇 page 로 압축을 해서, 기계를 사용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가장 잘했씀. 그래서 처음엔, 미국생활 2-3년밖에 않된 동양인 학생을 고용하는 것에, 엄청난 반대가 있던 백인 교수들도, 2-3달 이내로, 절대적으로 수긍을 했고,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 인턴들 수십명을 다 제치고서, 내가 매뉴얼 읽고서, 요약본 내는것을 전담하게 되었슴.
그때도, 미국백인학생에게 지지 않을 정도의 ,영어 어휘력과 문장 실력이 있었기에, 백인 학생을 다 제치고서, 내가 그역활을 할수가 있었슴.
그후로 지금까지, 문서 관리와 요약해서 보고서를 만드는것은, 나의 최고 장점중의 하나로, 어느 회사에서 일을 하건, 절대적인 실력으로 인정을 받아서, 밥벌이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슴.
학생 인턴이라서 , 일주일에 20시간만 일을 할수가 있었는데, 정말로 꽉꽉 채워서 일을 했슴. 연구실 내 책상에 앉으면, 일을 시작한 것이고, 나오면, 일이 끝난것이기에, 앉아서, 매뉴얼을 읽는일을 주로 하였지만, 피곤하면 졸기도 하고, 숙제도 하고, 잡생각도 하고등을 안했다고는 할수가 없슴 ;-) 그
렇게 압축매뉴얼을 만든후에, 일주일에 한번씩 10분간, 인공위성을 통한, sdsc 본부 연구실과의 통화를 하면서, 상황보고를 하고, 필요한 서류는, 그 당시는 우편으로 보내고, tape 저장장치로 보내면서, 내가 만든 서류를 보내고, 또한 새로인 일거리를 받기도 하였슴.
그 당시의 arpanet 을 인공위성을 통해서, 사용을 하는것은, 엄청나게 느렸슴. login 을 하는데만, 거의 2분이 걸렸슴. 그때야 물론,... 이렇게 빨리? 하면서 감탄을 하였지만, 그후로의 경험으로는, 엄청나게 느린 속도였슴....
국립 연구소였고, 인턴이었기에,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에, 아주 다양한 경험을 할수가 있었슴. 그래서 학부생 처음 2년간은, 학생인턴으로 일을 하면서, 컴퓨터 응용에 대해서, 엄청나게 배웠슴.
---
그 당시, 아직도 keypunch 로 입력을 하던 시기...
새로이 나온 TRS-80 이나, IBM XT 를 사용하는 법을 익혀야 하기에, 모든 고참교수나,정규 staff 는 , 아주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보고, 매뉴얼을 읽고서 사용법을 설명해 달라고 , 부탁을 하는데, 내가 못하겠다고 하면, 마친, 밖에 나가서, 자살을 할것같은 표정들이었슴. (이것은 나의 과장이 아니라, 다른 교수들과 staff 들이, 나중에 나에게 그렇게 설명을 해준것임).
---
그대신, 그 당시에 엄청나게 귀했던, laptop 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주말에 기숙사에만 있으면 답답할것이라고, 주말엔 laptop 을 빌려 주었슴. 콤퓨터를 빌려서, 집으로 가져와서, 2일동안. 내 맘대로 사용을 하는 것이 가능했슴. 그 당시 왠만한 연구자나 교수도, 상상하기 힘든, laptop 을 주말간 빌릴수가 있었던 것임.
지금 pc laptop과는 다른, minicom laptop 이었슴. 1983년 시세로 $3만-$5만 달러였으니, 40년전 시세인데, 지금 돈으로는 얼마인가? 수억원이 넘을것임. 수억원 넘는 컴퓨터를 , 내 혼자서 맘대로 쓸수가 있었슴.
엄청나게 좋은 경험을 하였슴. 그리고 그런 경험은 계속 쌓여서, 그 다음해에는, Fermi 국립연구소 학생인턴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진짜로, 고 이휘소 박사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던 페르미 연구소 였슴. 이휘소 박사는, 와 같은 (?) 이론 물리학자여서, 서재에 가보면, 훗날 나와 거의 비슷한 책들이 서가에 있었슴. 2/3는 물리학 책이지만, 1/3은 수학책.
(August 07, 2023)
Copyright© 2020-2025 Daniel SW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