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96: 좋은 인연

살면서, 위인들의 삶에서 배워야 한다고 해서, 많은 위인전을 읽었지만, 대다수는 출판사가 미화시키고 각색시킨것이 많았고, 종이로만 배웠기에, 실제로 배운것은 별로 없었으나, 소설이나 철학자의 책을 읽음으로서 배워서 인생의 길잡이 된것이 엄청나게 크지만, (Hermann Hesse, Somerset Maugham, George Gissing, James Hilton, Charles Dickens, Franz Kafka, Rainer Maria Rilke, Heinrich Heine, Lao Zi, Zhuang Zi),

실제로 만나서 교류하면서 배우게된 친구나 선배들의 영향력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서 보면, 아주 절대적이었씀. 그 당시에는, 그들에게 큰 고마움을 못 느꼈지만, 지나서 나이가 들고 나서야, 그들에게서 배운 좋은 경험이, 나의 아주 좋고, 생산적인 습관이 되어버린것을 알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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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에 대한 기억은 아주 희미한데, 국민학교 2학년때의 일로 기억을 함. 우리 또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 리어카에 해삼을 작게 짤라서, 옷핀을 펴서, 초고추에 찍어 먹는데, 그 당시 1원으로 기억. 뻔데기도 cone 으로 접은 신문지 한 봉지에 1원으로 기억. 하도 오래전이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이유가 있슴.

어느날 해삼을 파는 리어카가 왔는데, 항상 사먹는 것은 아닌데, 리어카 아저씨가, 그 동네 형에게, 그 당시는 중학교도 입시 였기에, 경기중학교에 들어갔다고, 잘했다고, 해삼을 하나 집어 먹으라고 하였씀. 그래서 경기중학교에 들어가면 아주 좋은것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슴.

바로 그전에 서울중학교에 합격한 동네형도 있었는데, 그 형한테는 해삼 한 덩이를, 공짜로 먹으라고 안했는데, 경기중학교에 합격한 형에게는, 해삼을 공짜로 주었기에, 경기중학교에 합격을 하는것이 , 엄청좋은 일이라고 막연히 느꼈슴.

그 형은 , 해삼을 옷 핀 핀것으로 하나를 집어 먹더니, 애네들에게도 주어야 한다고 해서, 나나 여러 꼬마들이, 해삼을 하나씩 얻어 먹었슴.

근데 한번은 , 그 당시에 흰색 5원짜리 동전을 용돈으로 받아서, 해삼을 사먹으려는데, 1원짜리가 없어서, 5원을 내고 , 하나를 먹었는데, 그러면 4원을 거슬러 주어야 하는데, 안 주었슴. 그래서 4원 거스름돈을 달라고 하자, 내가 1원짜리를 냈다고 , 발뺌을 하는것임.

근데 그때 그형이, 내가 5원짜리 동전을 내는것을 보았는데, 4원을 주지 않았다고 하자, ... 리어카 아저씨는, 그 형한테, 잘못 본것이라고 하고, 그 형은 확실히 지켜 보았다고 하자,] 그 리어카는 , 경기중학교에 가면 다냐... 하면서, 욕을 하더니...

... 전에 너 해삼 하나 먹으라고 햇는데 , 나를 가르키면서, 애도 , 재도 공짜로 먹었기에, 돈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더 이상 , 동네꼬마 중에서는 제일 큰, 경기중에 합격한 국민학교 6학년이 , 나이 많은 어른하고 싸우는 것은 불가능.... 국민하교 2학년인 나야, 무서워서 멀찌감치 서있기만 하였고... 다시는 리어카 해삼을 안사먹는다고 결심을 했고, 다시는 리어카에서 해삼파는 사람들, 상대하기가 싫어졌슴. 그

때 경기중학교에 합격한 그 형이, ,그리도 크고 강하게 보였슴. 비록 4원을 돌려받지 못했으나, 나대신 당당히 어른하고 싸워주는 것이, 그리도 멋있어 보였슴.

해삼사건 전인지 후인지는 기억이 않나나, 리어카에 뻔데기를 파는데, 둥근 돌림판에 여러개의 ㅣ작은 각을 만들어서, 두봉지, 세봉지, 혹은 1도의 각만큼만 지정해서, 전부 다, 같은 표식을 하여서, 필 돌려서, 작은 화살로 맞추는 재미가 있었는데,

그날 내가 그 1도각도로 나뉜, 전부다, 를 찍었슴. 옆에서 구경하던 동네 꼬마들이, 다들 .. 와 .. 하면서 , 놀랐고, 아마도 다들, 큰 솥 가득이 있는 뻔데기를 나누어 먹을 생각을 했을것임.

어린 나야, 어떻게 큰 솥에 있는 뻔데기 어떻게 다 가져가나 하고,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리어카 뻔게디 아저씨는, 잘못되어서 무효라고, 하면서, 그냥 가려고 했고, 그 경기중학교에 합격한 형은, 정확히 합격전인지 후인지는 기억이 않나지만, 바로 그형... 얘가 , 전부다 를 찍었는데, 왜 안주냐고, 나 대신 싸워주엇는데, 국민학교 6학녕이 , 일반 어른하고 싸울수는 없는 것이고, 그 형이 워낙에 적극적이었기에, 주변의 아저씨 아줌마들도, 그 형 편을 들엇으나, 그 뻔데기 장수는 욕 하면서, 리어카를 끌고 갔고, 꽤 오랫도안, 우리동네에는 오지를 않았슴.

국민학교 2학년이 보았을때, 6학년은 엄청나게 커 보였고, 특히 당당하게 나를 위해서 대산, 어른에게 말해주고 싸워주는 모습을 보았을때는, 몹시 위대해 보였슴. 그러면서, 어린 학생이엇지만, 더 당당히 내가 할말을 하려하게 되었슴.

그 당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어른 심부름을 갔는데, 1원이나 2원 짜리가 없어서, 5원이나 10원 짜리를 내면, 어른들이 잔돈을 거슬러 주지 않는것. 그런 나쁜 경험이 꽤 있었는데, 국민학교 저학년 어린이가, 어른하고 말싸움을 할수도 없고, 돈만 손해보고 마는것.

그나마 내 말을 다 믿어준 식구와 주변 어른들 덕에, 내가 삐뚜로 나가지 않았슴. 그러면서, 노가다 분야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어려버 부터 , 경멸하게 되었슴. 그런식으로 어린이 돈을 빼앗아야 했는지. 그런 사람들 하는 소리는 똑같음. 살기 힘들어서 그랫다는데, 살기 힘들면, 어린애 돈을 빼앗아도 되는지.

아주 어렸을때라서, 그 당시 시세로는, 1원, 2원도 나에게는 큰돈인데, 5원이나 10원을 내고서, 잔돈을 못 받으면, 얼마나 억울 했는데, 항의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 형은, 최소한 두번은 나를 위해서, 대산 어른하고 싸워주엇씀. 결코 잔돈을 돌려받지는 못했어도, 표현이라도 할수 있었던 것이 너무 좋았슴.

같은 동네에 살았기에, 동네에서 자주 마주쳤었는데, 그 후로는, 내가 더 당당히 말하고, 큰 가게에서만 물건을 사고 ,(지금도 재래시장에 가는것 싫어함), 리어카등 잡상인이나 가판에서는 물건을 전혀 안사니까, 언급한것과 같은, 나쁜 경험도 없었기에, 그 형을 마주칠때마다, 고마움 마음만 많았슴.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쯤에는, 어릴때 그리도 커보였던 형이, 고1인 나보다 키가 작았던 것으로 기억해서, .. 우습다는 생각을 종종하였슴. 어려서 부터, 동네에서 같이 축구하고, 뜀띠기 하고, 과자 사먹으면서 놀던 형이기에, 이름도 정확히 기억을 못하였는데, 한참후에, 군복을 입은 모습도 보았고, 그후로 내가 미국에 오면서, 완전히 소식을 알수 없게 됨.

그 형처럼 , 상황에 따라서는 남을 대신해서, 말해주고 항변을 해주는것이 그리도 멋지게 보였고, 위대해 보였는데,...

훨씬 커서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남대신 말해주면, 그 피해가 몽땅 나에게 올뿐아니라 , 대신 항변해 주었던 그 남이, 오히려 나의 뒤를 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여서, 남의 일엔 완전히 신경을 안쓰게 됨.

( 그 형도, 경기중학교에 합격햇다고 칭찬도 들었다가, 나 때문에 경기중학교에 합격햇다고 잘난척 한다고, 욕도 먹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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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2학년때, 수줍음도 많고, 다른 학생도 대하기가 어려웠고, 마음도 제대로 표현을 하기 힘들었던 나이였지만, 어떤 동급생들은, 더 활발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나도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싶어도, 왠지 부끄러워서 못하곤 하였슴.

그때 짝이 되었던 여학생이, .. 나 너 좋아하는데, 더 친하게 지내자... 하는데,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데 순간적으로 몹시 당황을 하였지만, 그 말에 갑자기 나도 용기가 생겨서, ... 너 말고, xx 를 좋아해...

라고 말하였고, 그 여학생도 얼굴이 시뻘게 지면서, 몹시 당황한 표정. 어쨌거나 그 상황은 피했고, 그후로는 더욱 확실히 내가 의사 표현을 하는 자신감을 갖게되었고, 국민학교 2학년 그때 이후로는, 지금까지도 직설적으로 의사 표현을 함.

그 여학생하고는 그후로도 국민학교 졸업할때까지, 2번을 더 짝을 했는데, 몹시 불편한 짝이 되었슴. 커서는 못 만났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여햑생에게 너무 미안하게 느끼지만, 그 이후로 인간관게에 있어서는,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대화를 하는 전환점이 되어서, 일찍부터 남에게 직접 배운 영향이 컸슴.

그래도 사회 생활에 문제가 없는것이, 다들 나같이 직설적으로 솔직하게 표현을 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니, 문제가 없는것임.

하지만 훗날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워서 고마워했던 것처럼, 그 때 너 때문에, 내 인생에서 크게 배웠다고 말하지는 못할것임. 그 여학생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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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5학년때의 친구인데, 성격은 나하고 꽤 달랐는데, 많이 설치고, 아주 잘 돌아다니는 타입이어서, 난 굳이 피하려고 했었는데, 어디고 갈때면, 나를 꼭 끌고 가려고 했슴. 스쿨버스를 타고서, 통학을 했는데, 하교할때, 스쿨버스로 거의 종점인 동대문까지 가서 내려야 하는데, 그 중간에 내리면서 , 내 책가방도 갖고 내리면서, ... .ㅅㅇ 아, 네 책가방 갖고 내린다... 하면, 책가방이 있어야 하니까, 집까지 가서 내리지 않고, 가방을 찾기 위해서 그 친구 따라서 내려야 햇고, 물론 그 친구 혼자가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함께 내리는데, 나도 본의 아니게 끼어서, 그 친구들하고 어울려 다녀야 했는데,

국민학생들 치고는, 아주 활동 반경이 넓게, 많은곳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나도 새로운곳에 많이 가보게 되었슴. 국민학교 5학년, 6학년 , 2년동안, 그 친구 쫒아서 꽤 많이 돌아다녔고, 나도 모르게 서울 구경을 많이 하였슴. 낯선곳을 벼롤 낯설러 하지 않고, 여러 행사를 찾아서 가서 구경도 하고. 나도 모르게 , 그렇게 찾아 다니는 것이, 습관화 되었슴.

그리고 적극적인 성격에, 국민학생이라는 장점으로(?),, 입장료 안내고 무료로 들어가기등.

그러면서, 다른 국민학교에 다니는 친구들 만나러, 명륜동, 혜화동에도 자주 갔고, 광화문 덕수궁이나, 남산에도 자주 갔고.

조금 커서 느꼈지만, 동대문구, 종로구가 넓은 것을, 그리고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참 많이 보고 , 느기는 것도 많았슴.

그 친구는 국민학교 졸업후에, 여태것 50+넘게,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고, 소식을 아는 친구들이 아무도 없어서, 몹시 궁금함. 그 친구가 살던 숭인동의 집은, 2019년까지는 있었는데, 물론 이사를 간지는 오래 되었슴.

그리고 좀더 다 넓게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하엿는데, 그것은 중학교 1학년때 만난 친구에게서 배웠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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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언급을 했던 친구인데, 중1때 부산에서 전학을 했는데, 사는집이 바로, 우리집에서 큰 길 건너편. 그래서 전학온 첫날부터 친해짐.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서, 아시아와 유럽에서 생활을 한 경험때문에, 서양식 태도를 갖았기에, 서울의 일반공립중학교에서 적응을 못하여서, 중학교 내내 고생을 하였슴.

회기동과 동대문을 오가는, 통학 스쿨버스를 타고다니면서, 또한 위에 언급한 ㅇㅂㅇ 이를 따라서 , 동대문구와 종로구는 아주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 친구는, 유럽에서 하던 식으로, 버스를 타고서, 끝까지 종점까지 가면서, 구경만 하던가, 아니면 중간에 내려서 구경을 하는데, 일반적으로 내린 곳의 반대편에서 버스를 타면, 타고온 집쪽으로 돌아가게 되거나, 종점에서 내리면,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면, 집뽁으로 가게 됨. 그래서 길을 잃을 걱정이 없고, 큰 두려움 없이, 어떤 버스건 낯선곳에 가는 버스라도, 타고서 가면 되었슴.

이 친구는, 외국에 살다가, 부산에 잠깐 살다가, 중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이 되었고, 서울의 많은곳을 구경다니고 싶었는데, 마침 나와 죽이 잘 맞았고, 같이 서울 구경을 하기 시작했는데,

동대문에서 어떤 버스건 타고서, 종점까지 가거나, 중간에 내려서, 구경거리가 있으면 구경을 하고, 내렸던 곳의 길 건너편의 버스 정류장에서 타고온 같은 버스를 타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서울 여행을 , 거의 3년간 반복을 하였슴.

중학교때, 동대문에 살면서, 버스를 타고서, 서대문에 가거나, 합정동이나, 영등포나, 뚝섬등에 가는등, 그 당시로는 엄청나게 모험이었는데, 자꾸 그리 다니다보니, 점점 자신을 갖게 되었슴.

고등학교는 다른 학교로 진학을 하였지만, 계속 연락을 하여서, 종종 같이 어울려 다녔는데, 내가 미국에 오기 며칠전에 만났을때, 곧 군대에 간다고 해서, 본것이 마지막이고, 지금까지, 어느 친구도 소식을 모름.

그후로 미국여행이나, 세계 여행을 할때, 가는 교통편이 있으면, 오는 교통편은 당연히 있을 것이기에, 어데고 안가본에 가는 여행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 경험을 하는, 전화점이 그때엿씀. 그

친구는 또한 당당하고 부침성이 좋아서, (많은 서양인들이 그렇듯이), 중학교때까지 내가 소속했던 여러 모임에 , 친구로서 쫒아와서는, 어색해 하지 않고, ㅅㅇ 친구라고 하면서, 잘 어울려 지냈슴. 나도 그런 성격이었기에, 둘이서 같이, 낯선곳의 낯선 모임이라도, 무난하게 끼어서 지내게 되었씀. 그래서 인지, 친구학교 동창회에도 참석을 하고 , 내 주도로 남의 학교 동창 모임도 만들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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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도 중1때 친구인데, 자주 어울렸었는데, 무슨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이 않나나, 내가 직설적으로 말하고, 도울수 있으면 돕자는 주의였기에, 남을 도와주려다가, 대신 욕을 왕창 먹었던 경우. 그 상대도 내가 당사자가 아니지만, 나에게 대신 , 욕을 퍼붙고 곤란해진 상황이었고, 당사자는 멀리 도망을 가서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경우.

상황은 진정되었는데 , 그 때 그 친구가, 세상살이는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 하는데, 참 마음에 새겨졌슴. 그 전에도, 그후로 어른이 되어서도 수십번, 그런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당시 그 친구가 한 말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고, 흔히 말하는 인생관이란 말을할때,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하게 되었슴.

지금도 한국사람들하고 말을 할때면, 내 인생관은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함.

영어로 할때는, "Now or Never!" 라고, 지금 현실을 살자고 함. 오지 않은 미래에 살지 말자고 함. 지금이 바로 해야할 때임.

하지만 한국인들 사회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회적인 변수가 있기에, 잃을것이 없다고 , 막장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많아서, "더러워 지기 피하자" 라는 기준으로 대인관계와 상황을 대하게 되니까, 훨씬 한국사회 생활이 편해졌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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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때 ㅇㅂㅇ 과 중학교때 ㅇㅎㅅ에게서 배운 여행 방식이, 그후로 내가 여행을 과감히 하는 방식의 기초가 되었고, 그 친구들에게서 배웠는데, 그후 소식을 모르니 몹시 아쉬움.

그 친구들도, 나같은 스타일의 친구를 만났기에, 더 잘 돌아다닐수가 있었을 것임. 그래서 일반적인 대다수의 친구들과는 교류가 힘들어서, 대부분의 동창들과는 연락이 끊긴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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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때, 2달간 아이템플 학원에 다닌적이 있었는데, 그때 같은반에 있던, 지금 이름은 완전히 잊었기에, M 이라고 하는, 친구와 금새 친하게 되었슴.

그 친구도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서, 외국 생활을 하였고, 그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함.

외교관 자식인 국민학교, ,중학교동창도 여럿 있었기에, 역시 외교관 자식으로 유럽에 살았던 M 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주 낯설지는 않았슴.

난 우연치않게, 중2때부터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공부하게 되어서, 꽤 프랑스어나 독일어 잡지를 읽을수가 있었슴. 아주 드문 경우였는데, M 이 아마도 프랑스와 독일에서 살다가 온것 같았슴. 하도 오래 되어서 기억은 희미함.

어느날 프랑스나 독일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는데, 영화를 많이 보는 아버지 따라서, 영화를 많이 보던 시절이었는데, 공짜로 프랑스와 독일 영화를 볼수 있다고 해서, 놀라면서 좋았슴.

그래서 그 친구 따라서 간곳이, 지금은 남대문에 있지만, 예전에 경복궁 입구 건너편에 있던 프랑스 문화원이었고, 지금도 그자리에 있는, 해방촌 윗쪽, 남산 순환도로에 있는 독일 문화원 이었슴. 독일 문화은 일줄일에 한편정도 였지만, 프랑스 문화원은 여러편을 매달 바꾸어서 상영을 하였기에, 그후로 미국에 올때까지 아주 자주 갔고, 내 중고등하교 친구들중, 나에 끌려서, 프랑스영화관에 가본 친구들이 꽤 될것임.

그때 가본,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의 분위기는 아주 새롭고, 신세계 였슴. 그 친구는 ,그 훨씬전부터 자주 왓었기에, 나에게 분위기를 설명해 주었고, 살다 왔었기 때무인지, 잡지도 읽고, 영화도 보고 하는등, 아주 편하게 지냈고, 나는 서서히 분위기에 익숙해 지려고 하였씀. 나에게는 서울 여행과는 아주 다른, 서울에서, 프랑스와 독일 경험이었슴.

그로부터 프랑스는 10년후, 독일은 20년후 직접 방문을 하게 되었지만, 중2 겨울 방학때 경험한 ,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 경험은, 완전히 신세계였슴.

그 친구는, 2달 학원을 다닐때 이후로는, 거의 못 만나다가, 고등학교때 제일학원 단과반에 나갈때 잠깐 마주쳤고, 그 이후로는 전혀 소식을 모름. 이름도 기억을 못할 정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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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화동 로타리에서 성북동 가는 길에 있던, 학생과학은, 나의 국민학교 , 중학교 시절, 대학생이하의 학생들을 위한, 유일할 학생과학이라는 잡지도 발행하였고, 갖가지 과학모형과 도구를 팔던 곳이라서, 경제적인 여유가 조금 되는 가정 출신이면, 학생과학에 가서, 여러 과학실험 도구를 사와서, 집에서 실험하면서 과학에 더 흥미를 갖게 되었고, 최소한 학생과학이라는 잡지라도 구독을 하면서, 많은 정보도 얻을수가 있었슴.

이름은 전혀 기억을 못하기에, H 형이라고 부르겠는데, 처음 만난때가 , 국민학교 5-6학년때 였는지, 중학교 1학년때 였는지는 기억이 않나나, 중학교 2학년때가 마지막인 것은 기억을 함. 중2 이후로는, 내가 학생과학을 지나치기만 하였지, 들어가지 않았기에, 확실히 기억을 함.

H형은, 학생과학사 안에서만 만났슴. 어쩌다가 가면, 갈때마다 있었기에, 조금씩 대화를 텄고, 아마도 나보다 2살 위였던것으로 기억을 함. 볼때마다 중학생의 2부머리 였고, 나와같은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것을, 확실히 기억을 하는데, 내가 국민학생이었는지, 중학생 이었는지는 기억을 못하는데,

학생과학사내에서 이런저런 애기를 하거나, 건물밖으로 나와서, 버스 정류장에 서서거나, 건물에 기대거나 앉아서, 항상 나에게, ... 이런것 아니 ?.... 하면서, 알려진 아주 많은 과학상식들... 난 철저히 듣고 배우기만 하였슴. 그 당시 나도 학생과학을 구독하고 있었기에, 매달 같은 주제로 얘기할수가 있었는데, 그 형은 어린 나에게 , 나보다 2살많은 지식의 경험으로, 참으로 많은, 교과서 에서 배우지 않는것을 알려 주었슴.

사람에게서 직접 배우는것이, 학교 선생님이나 동네 어른들보다, 훨씬 많았고, 그후로 오랫동안, 그형이 알려주었떤 주제는, 중고등학교 시절, 많은 연구의 자극을 주었슴.

그 당시는 어느학교 다니고, 어느 동네에 산다는 것을 들었지만, 학생과학사에서만 마주쳤고, 연락을 주고 받아서 만난것도 아니어서, 개인적인 것은 전혀 기억을 못함.

그 형을 못만난지, 1년정도 지나서 였는지, 어느 잡지에서 그 형에 관한 기사를 보았는데, 과학꿈나무의 죽음 이라는 기사였는데, 그래서 사망한 것을 알게되었는데, 어찌 사망했는지도 기억이 않나고, 일기를 썼는데, 스스로 개발한 암호로 썼기에, 다른 사람이 읽을수가 없다는 기사였는데, 기사 내용보다, 내가 직접 그 형을 만나면서 들었던 것이 많았기에, 한동안 그형 생각을 많이 하다가, 쉽게 잊혀져 갔슴. 더 알고 지내고 싶었지만, 다른 동네에 살고, 다른 학교에 다녔기에, 우연히 학생과학에서 마주치지 않으면, 만날수가 없었던 것이 이 아쉬웠었는데, 그 기사를 보면서, 다시는 못 보겠다는 아쉬움만 더 커졌슴.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이 소개하는 책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 방법과 과정을 배우게 된 , 동기가 되었던 경우. 세계 명작이라고 소개를 받기 보다는, 본인이 직접 읽은 책을, 어떻게 감동을 받았다는 경험이야기가, 진짜로 책을 읽는 동기가 되고, 배울수가 있슴.

그 형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것이 없지만, 나에게 자신의 과학지식을 뽑내듯이 설명해 줄때는, 난 침을 질질흘리면서 들엇다고 해야하나...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소개받았고, 구체적인 어떤 액을 읽거나, 어느 과학관이나 전시회에 가면 볼수 있다고 소개도 해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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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에게 전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였던 김정흠의 자기계발 11조, 글을 소개해 주었는데, 김교수는 자신이 버는돈의 10%를 , 자기계발을 위해서 투자하지, 교회에 헌금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 수입의 10%로 필요한 책도 사고, 자료도 사서 실험해 보는등, 자신의 취미와 전문성을 위하여 재투자를 한다는것.

어린 학생이었던 나야, 달달이 용돈을 받아서, 학교생활을 하였기에, 충분히 10%를 떼기가 힘들었지만, 아주 인상깊게 남았고, 좀 더 컸고, 경제적으로 수입에서 여유가 생기면서는, 김정흠 교수의 11조를 자기계발비와 여행경비로 따로, 구좌를 만들어서, 저축을 하여서, 여행비용으로도 사용을 하고, 필요한 책이나 각종 과학장비도 사고, 취미생활도 체계적으로 하게 되었슴.

김정흠교수의 자기계발 11조 자체도, 나의 안정적이고 생산적인 생활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는데, 그 H형이 소개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임.

커서 생각해보니, 세전이냐 세후냐에 따라서, 11조의 액수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데, 어차피 저축의 개념이기에, 그런것은 초탈하게 되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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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인 친구는, 미국에 와서, college 다닐때 알게되었는데, 공학전공이었지만, 필수과목인 수학과 물리학 과목을 같이 여러개 들어서 알게 되었슴.

그 당시나, 지금이나, 항상 내손에, 커피나 콜라잔이 들려있는 것을 보고서는, 내 건강 걱정을 엄청나게 해주던 백인친구 였는데, 난 담배를 안 피우기에, 콜라나 커피라도 마시면서 쉬어야 한다고 항상 말해 주었슴. 하루에 마시는 커피값과 콜라값도 만만치 않은데, 지금도 하루에 마시는 커피값과 콜라값은 식사값 만큼은 아니지만, 집에 있거나 여행을 갈때, 따로 예산을 잡아둘 정도로, 커피와 콜라를 엄청나게 많이 마시고 있슴.

이 친구가 Caltech 은 편입 시험이 없다고 하지 않았으면, 난 Caltech 응시를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임. 그 당시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면서, $30을 입시지원서로 쓴다는 것이, 엄청난 부담이었슴. 그 당시, 맥도날드 빅맥이 $2이 안되었어던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빅맥 거의 20개 값, 점심 20기 값이어서, 입시원서 지원비로는 부담이 있었슴.

그후로 여러 의미에서, 나의 인생의 흐름이 바뀌어서, 현재에 오게 되었슴.

하지만 그 친구는, Caltech 은 응시도 못햇고, UCLA 에도 편입 실패를 하여서,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채로, 연락이 끊겼슴. 하지만 종종 그 친구가 나를 어디에서 보았다고, 다른 친구들에게 얘기 했다는 말을 종종 듣기는 하였슴.

그 친구의 사소한 정보 하나로, 나는 인생의 전화점을 갖을수가 있었슴. 물론 내가 많은 준비가 되었기에, 그런 기회를 갖을수가 있었지만, 미국생활 초년병시절, 최저임금을 받고서 일을 하면서는, 햄버거 하나 점심으로 사먹기에도 부담이 되었던 시절에, 무료로 입시원서를 쓸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정보였슴. 시도를 해불수가 있었슴.

또한 , 아주 늘씬한 금발 백인이었던 그 친구는, 흔히 말하는 옷발이 아주 잘 받았슴. 그리고 그 당시는 내가 한국에서 온지 몇년 않되어서, 한국에서 가져온 옷을 입어서, 한국식 옷 스타일에, 신참이민자 티가 확났었는데, 그 친구의 옷발을 보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옷은 안입고, 미국 옷가게에서, 백인들이 입는 옷 스타일로 사서 입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옷을 안사입고, 미국에서만 옷을 사 입음. 옷차림에서도 미국화 되는 계기가 되어서, 주위 사람들과 더욱 비슷하게 화합을 할수가 있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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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지만, 콤퓨터 사용은 오래 하엿지만, 실제로 IT 분야로 들어가게 된 동기를 준 두명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을 하였슴.

두번 다 버클리에 다니던 시절, 여름방학때 일할 직업을 구하던 중에 생긴것 이었는데, 그 당시에 벌써 10년 이상의 컴퓨터 전문가로 일한 경험이 있었기에, 햑생이 여름 3달간 할 직업을 구해도, 쉽게 구할수는 없었슴. 그래서 안하더라도, 인터뷰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면서, 별로 관심이 없어도, 이력서를 보내곤 하였는데, databaase 라는 아주 관심이 없었지만, database developer 를 뽑는, San Jose 의 어느 인도인이 하는 작은회사에 인터뷰를 갔었슴.

이름은 지금도 Gupta 라는 것만 기억나고, 정확한 위치와 회사 이름도 금새 잊엇지만, 인터뷰때 , 내 이력을 보더니, database 분야도 금새 잘할수 잇다면서, 배우면서 일을해도, senior engineer. 대접을 해주겠다고 해서, 무조건 일을 시작했는데, 매일 출근을 안해도 되었고, 주는 많은 database 관련조사를 읽고, 배우면서, 종종 assignment 을 주었는데, 거짓말 같이, 다 좋은 결과를 내는 일을 하면서, 약 10주간의 여름일을 마칠수가 있었슴.

그 당시는 modem 으로 원격접속을 하였고, 배워야할 여러 database 가 있었는데, Ingres 는 UC system 에서 개발을 하였고, 나도 꽤 알고 있엇지만, 관심은 없었는데, Ingres 를 기초로 시작된 DB 를 배우기 시작해서, Oracle, Sybase, Informix 등을 사용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는데, 너무도 쉽고 수월하게 배우게 되었고, 훗날, 지금까지 30년간, 내가 iT 에서 일을 하는 기초를 닦게 되었씀. 물론 그전에 10여년을, systems engineer 와 CAD architect 로 전문성이 있었지만, database 라는, 진짜 모든 IT 의 기본이 되는, 여러 database 의 기초를 그 당시에 닦았슴.

그 당시 시장에 나왔던 4개의 database 에 친숙했기에, 아주 전문가는 아니엇어도, 어떤 DB를 일하는 동안, 접해야 하건, 두려움같은 것이 없었씀.

가서 Mr Gupta 씨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후로 그 사무실자리도 재개발로 없어져서, 다시 찾지를 못하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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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다음해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Lawrence Livermore Lab 에 UNIX systems adminitrator 가 여름학기용으로 구인 공고가 떴슴. 시스템 관리는 전혀 관심이 엇었지만, 오랫만에 Livermore 지역에 등산도 할겸, 인터뷰를 갔었는데, 담당하던 젊은 백인 여자 비서가, 내 배경이면 아주 잘 할수 있다고, 책도 여러권 빌려주면서, 하기를 나에게 강요했슴. 일단 빌린 책을 집으로 가져와서 보았는데, 의외로 쉽게 이해가 되었도, 해볼만 하다고 느끼기도 하였슴.

하지만 버클리에서 리버모어까지는 , 한시간 운전거리라서, 너무 멀다고 하니까, 왕복 시간에도 헤택을 주겠다고 하면서, 계속 반강요를 하였는데, 그리고 다른 summer job 을 찾기 전이라서, 일단은 오가며넛 system administration 을 하기 시작했는데, 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었던 것은,

그간 개발자로서는, 숲속의 나무 하나에만 아주 전문적으로 집중을 햇다면, system adminitrator 로서는, 큰 숲 전체를 관리하면서, 나무도 섹션별로 관리하면서, 나무 한그루를 관리하는 시각을 갖게되었슴. 의외로 몹시 재미 있어서, 10주의 기간을 다 채우게 되었고,

그 후로,. 시스템 통합, system integration 이라는 분야로 내가 IT Consulting 을 , 지금까지 하게 되었슴.

그 당시 그 백인 여자비서의 반강요가 없었다면, 난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것임.

그후로 다시 그 백인여자 비서를 만나지 못했는데, 그건물과 프로젝트가 , DoD 지원을 받기에, 건물 자체에 외부에서 함부로 들어갈수가 없었고, 이름도 기억을 못해서, 지금까지 영원히 잊혀져 가야 했슴.

콤퓨터를 계속 사용해야 하는것과, 콤퓨터 운용을 하면서 밥벌이 하는것은 별개임. 내가 SI 를 지금까지 하게된것에는, 위의 두 사람의 권고가 절대적이었고,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해준것에는, 지금가지도 감사해 하고 있슴.

물론 SI 를 안했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만족해 하며, 잘 살았을 것이지만, 그 두사람이 변곡적을 준 것은 확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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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한 경우는, 몹시 긍정적으로 배운것만 인데, 그 외에도 더 언급해햐 할 사람들이 있는데, 진짜로 큰 변곡점을 긋게된 경우라고 생각되는 몇가지 언급을 하였슴.

일반적인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로 배운 경우는, 개인 블로그에 여러편이 소개되어 잇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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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상황인데, 참으로 많은것을 느끼게 하였다.

1980년 여름의 일이다.

명륜동에서 친구와 약속을 마치고서, 비도 오기에 혼자서 감상에 젖어서 대학로를 따라서 천천히 동대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자주 걷는 길이었지만, 비가 조금씩 내리기에, 비에 젖은 가로수를 보는것도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학림 다방앞을 지나왔을때, 어떤 비에 흠뻑젖은 지게를 진 할아버지가, 나를 보더니, 젊은이 500원짜리 빵 하나만 사줘 하는것이 아닌가?

아주 삐쩍마른 왜소한 체구의 할아버지가 비에 흠뻑 젖어 있어서, 더 왜소해 보였고, 거기다가 목소리에도 힘이 없어 보였다. 비가 오니, 지게를 부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수입이 없어서 식사를 못하여서 몹시 배고픈데다가, 비까지 홀딱 맞으니, 몹시 지쳐버려서, 그냥 구걸을 하는것 같았다.

그러한 상황은 쉽게 판단이 되었는데, 내 주머니에 10,000원 짜리가 두장 있었고, 그 만원 짜리를 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만원 짜리를 500원 때문에 헐며는, 순식간에 만원이 날라가는 경험을 다들 하였을 것이다. (1980년의 만원은 2022년의 만원보다 훨씬 컸다).

그래서 나는 지금 돈이 없는데요 하였고, 그 할아버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냥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면서, 나는 계속 동대문 방향으로 직진을 하였고, 서울의대 문앞에 왔을 때까지 1분이 채 안되는 사이에 내 머리속은 엄청나게 복잡하게 움직였고, 만원을 헐더라도 그 할아버지에게 빵을 사주지 않으며는 후회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돈이란 제대로 쓰일때 가치가 커지는 것이고, 나도 약간의 돈이 아쉬워서 힘들고 고생을 할 때가 있지마는, 이번만은 내가 돈을 써야 할때라고 크게 깨닭아졌다. 그 비에 젖어서 추위에 떨고 배고파하는 그 할아버지의 갸날픈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뒤로 돌아서, 그 할아버지를 찾았는데, 불과 1분도 안된 시간인데 찾을수가 없었다. 학림다방 아래쪽에 있던 중국집에 들어갔나 하여 들어가 보았고, 다른 사람이 대신 빵이나 밥을 사주나 하여서, 다른 식당에도 들려 보았으나. 찾을수가 없었다.

그냥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나 하여, 골목길도 여기저기 찾아 헤멨다. 그러기를 무려 30분, 나는 비가 내리는 그 일대를 골목 골목 찾았으나, 그 할아버지의 찾을수가 없었다. 못 찾으며는 후회를 하는데, 하면서 나는 몹시 조급했고, 그런 조급함에도 아랑곳없이, 그 비오는 거리 어느 곳에도 그 할아버지가 간곳을 찾을수가 없었다. 그

러는 30분 사이에 나도 비에 젖었다. 내가 추위에 한기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냥 집으로 향하기로 하였다.

집으로 오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며, 혹시라도 뒤에서라도 그 할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하며, 빨리 갈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허탈함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 500원짜리 빵 때문에 내 마음이 이리 불편하게 된것이 괴로웠다. 돈은 제대로 쓰여야만, 갖고 있는 사람이 가치있게 쓰는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배운 것이다.

그 500원은 내 생활에 전혀 영향을 미칠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에게 만원 짜리를 헐면서라도, 500원짜리 빵을 사 주었다며는, 그 할아버지에게 엄청난 만족을 주었을 거싱고, 나도 만족을 하였을 것이다. 그 500원 엄청난 가치를 발휘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원 짜리를 헐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500원을 엄청나게 만족스럽게 쓸수있는 기회를 놓친 나의 판단에, 나의 가치관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돈은 쓸때 제대로 쓰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는 적은 금액 일수도 있겠지만, 제대로 쓰이며는 남에게는 아주 요긴한 돈이 될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닭았다. 부의 척도는 상대적이다. 마음의 여유를 약간씩만 갖고서 주위를 돌아 본다며는, 새로운 관점으로 가치를 부여 할수가 있다.

그 후로 학림 다방 부근을 지날때며는, 혹시라도 하며 지게를 지고있는 할아버지를 찾게되었다. 1980년 11월에 미국으로 올때까지 몇 개월 간, 학림다방을 지나는 것은 부담이 되었다. 그 때에 다시 마주친다고 하여도, 별다른 것은 없었겠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서라도 도움을 받아서 요기를 해결하여서, 건강하게 지냈기를 바랐는데, 전혀 보이지 않으니, 괜시리 마음에 부담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 당시도, 용돈을 받아쓰는 학생이어서, 금전적으로는 제한이 많았다가,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내 수입을 분리해서 조절해서 사용을 해서, 나게에게

11조도 하고, 기부도 하는 여유를 갖을수가 있었다.

나하고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에게는, 반드시 이 이야기를 한 번씩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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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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