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77: 여행/탐사

지금은 별로 아니지만, 나의 20,30.40대의 여행은, 학술 탐사라고 해야지, 일반적인 여행은 아니었는데, 한국에서 그런 여행 경험을 여행하면, ... 에이 하면서 믿지 않거나, 과장이 심하아도 하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믿거나 말거나,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학술 탐사 였기에, 귀한 시간을 내서, 여러나라의 오지탐사나, 어던 주제를 찾아서 다니게 되었슴.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여행/탐사에는, 그 전에 다른 나라 탐사에 비해서, 여유가 있고, 편했지만, 한국에 산재해 있는 "석불" 탐사가 주된 목표였고, 그것은 내가 앞으로 한국에 간다고 해도 마찬가지.

한국의 석불 200여기 이상을 탐사해서, 사진 자료와 역사를 기록했는데, 아직도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있는것이 아쉬움.

여러번 언급을 했었지만, 그 나라 언어를 모를경우엔, 일반적인 여행이나 탐사를 가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지역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지역사람들과만 어울리면서 가는 여행/탐사를,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전혀 이해를 못함. 대부분 여행단체가 데려가는대로만 갔다올뿐, 어떤 주제로 스스로 찾아 다니는 경우가 없고, 그 지역 언어를 알면서 가는 경우는 아주 드묾.

미국에 오더라도, 대부분 관공단체를 통한 여행을 하고, 혼자서 자유 여행을 하는 경우는, 지금은 예전에 비해서 조금 많아졌다고 해도, 거의 한국 사람들하고만 같이 다니는 여행이 됨.

나도 한국 음식을 좋아 하지만, 해외 여행을 하면서, 한국에 있을때는 빼고서는, 한국 식당에 전혀 안감. 그 지역 음식을 먹으면서 지냄. 라면도 안 가져가고 , 오직 coffee mix 는 항상 가져 가는데, 새로운 지역에 가면, 주변 분위기를 익히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고, 커피는 하루에 두잔은 마셔야 하기에, 지역의 커피샾을 찾기 전까지는, (동서)coffee mix로 버팀.

지역 음식이 항상 입에 맞는것은 아니나 , 그 지역에서만 맛볼수 있는것을 맛보자고 가는 여행/탐사이기에, 그곳만의 것을 경험하고 오게됨.

사진장비하고, 공 DVD를 잔뜩 가져가서, 사진 자료와, 글 자료를 많이 담아서, DVD 에 백업을 해서 옴. 그리고 아무리 여행이라도, 여행 짐을 줄이자고, 옷을 한두벌만 가져가는 여행자가 많은데, 같은 옷을 너무 오래 입으면, 내가 지쳐서 , 집에서는 매일 옷을 갈아입던 생활에 익숙해져서, 셔츠는 많이 가져가서, 매일 갈아 입는 편. 내가 즐기는 패션은, 다양한 셔츠를 입는 것이기에, 매일 옷과 셔츠를 갈아입지 않으면, 내가 답답하게 느낌.

중국 여행을 안가본, 한국 사람은 지금은 거의 없겠지만, 대부분 한국인 단체관광으로 갔을뿐이라서, 갔다온 일정이 거의 모든 한국 사람은 똑같음. 일부 젊은이들이나 자유여행을 한다고 해도, 가는 코스는 거의 같음. 극히 일부만 중국어 하면서, 전문분야에 관련된 여행을 할뿐.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중국인으로 알 정도로 Mandarin 중국어에 유창했고, (하지만 지금은 그냥 하는 정도), 상하이 방언이나, 민남 방언을 조금 하고, 중국의 소수민족어인, 몽고어 , 만주어는 꽤 했고, 티벳어, 위구르어는 조금 하는 정도.

북경과 상해에서 한 학기씩 교수 생활도 하였기에, 중국의 구석구석을 잘 아는, 옛 동료교수나 학생도 많이 알기에, 일반인은 알지도 못하고, 접근도 못하는 , 숨은 유적지를 많이 알고있는 중국인 지인과 함께, 오지 탐사를 , 일반인은 상상을 못할 정도로 다녔슴.

중국에 처음 간때가 80년대 중반인데, 그 당시에 중국에 갈수 있던 한국 사람은 거의 없던 시절. 물론 나야 , 미국인으로 간것인데, 아주 가기 힘든곳에 갈수 있었던 나도, 대부분의 친구들이 상상 못할 정도의, 배경에 인맥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런 인맥과 배경은 계속 살아있었기에, 일반인이 못가는 곳에, 계속 탐사를 갈수가 있었으나,

결코 단순하지 않았던 중국 여행. 중국에 못가본지 10년이 되는데, 결코 포기할수 없는 중국 역사 탐사여행.

중국도 석굴/석불 탐사, 고사찰 탐사, 고건축탐사, 한시탐사등이 주된 주제였으나, 그냥 중국인 친구를 만나서, 찻집에서 잡담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한량생활여행도 종종 하였슴.

대만은 그리 볼것이 많지는 않지만, 미국에서 학교 다니면서, 워낙에 많은 대만대학 출신친구들하고 어울려서, 그 친구들 따라서 대만에 가게되면, 주로 타이페이의 대만대학앞으로 카페에서 같이 뭉개져 놀던 추억이 워낙에 좋아서, 혼자서 대만 여행은 거의 가지도 않았지만, 재미도 없었슴.

일본에 여행을 가도, 일본에서 신주쿠에 사무실을 15년정도 운영을 하였기에, 단순 여행과 탐사가 아닌, 사업기반을 하던 곳이라서, 한국에서보다 더 지역사람처럼 지냈슴.

일본에서 살았다면, 신주쿠에 15년씬 사무실을 내고서 사업을 할 정도면, 얼마나 안정적인 생활을 할수 있었고, 사업도 안정적이었음을 알수 있을 것임. 그런 기반에서, 일본 지방 여행을, 일본인 직원이나, 일본인 친구와도 했었고, 그들의 추천에 의해서, 혼자서도 여행을 하였고. 일본 전부를 여행을 하지는 않았았으나, 최북단 섬인,홋까이도를 제외는 다른 세개의 섬은 거의 다 여행.

일본의 탐사는, 성, castle 탐사와 일본 고사찰 탐사가 주목적. 일본에 300여개의 지방자치를 하면서, 각 지역마다 성주/다이묘가 300개의 지역을 , 각 지역에 성을 쌓아서, 교두보로 삼아서, 지역을 다스렸는데, 엄청나게 잦은 전쟁으로, 대부분의 성은 다 부서지고, 10여개 정도만 원형을 유지할 정도로, 전쟁이 심했슴. 지금 남은 100여개 이상의 성은, 일본이 경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한 50-60년대에, 역사 찾기의 일환으로, 콩크리트로 다시 지은것이 대부분.

일본은 각 지방마다, 특산품이 많아서, 장어요리도, 녹차도, 정종도, 맥주도, 모찌떡도, 각 지방마다 다 조리법이 다르고 맛이 다르기에, 그런 다름을 경험하러 전국 여행을 다니게 됨. 또한 물건을 싸는, 포장지도 하나의 예술 분야이기에, 모찌떡이나, 녹차를 싸는 봉투도, 다 제가각인데, 디자인이 좋음. 그래서 그런것 모으는 재미도 쏠쏠하고. 일본 여행은 진짜로 아기자기 함. 일본 여행이, 비싸다고는 하지만, 미국에서 $$$를 가져다 쓰는 입장에서는, 그리 비싸게 느껴지지가 않음.

영어, 불어, 독어, 스페인어등을 알면 세계의 모든 지역을 언어 불편없이 여행을 할수가 있는데, 그외에 몇개 언어를 더 , 기초만이라도 공부해 둔다면, 여행이 더 편해짐.

80년 중반에 5주정도 4주는 모스크바, 1주는 헝가리와 폴랜드를 방문하였지만, 동구유럽은 전혀 다녀보지 못했는데, 그 당시 쏘련에 가서도, 모스크바에만 있었고, 레닌그라도에도 못 갔슴. 그 당시 쏘련에 여행을 가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 당시 중국과 쏘련에 학술탐사였지만, 갈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배경과 인맥이 있음을 알아야 함. 한국 정부에서도 섣불리 갈수 없었던 곳을 갈수 있었다는것, 섣불리 나의 배경을 무시하면 안됨. 물론 미국팀의 일원으로 간것이었지만, 어쨌건 내가 한국인 이라서,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슴.

중남미에도 여러번 갔지만, 일반 관광이 아닌, 아주 특별한 학술 탐사여서, 유명한 관광지는 거의 가지를 못했슴.

남미의 볼리비아, 페루등의 Inca 문명의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Quechua 어를 1년간 공부 했었기에, 인류학사 탐험을 위해서, 미국 UCLA 대학과, Smithsonian 박물관의 지원아래, 미국 영사관의 안전관리 보호아래, 원주민 지역에 들어가서, 아주 힘든 자료탐사의 시간을 거쳤는데, 약 60-70% Quechua 어, 30-40% Spain 어을 사용하면서, 원주민들과 생활하면서, 대화를 통해서, 많은 자료를 습득. 그 당시에는 digital camera 가 보편화되기 전이어서, film camera 에 사진을 찍었기에, film 보호에 엄청나게 고생. 물론 지금 digital camera 가보편화 되었어도, 전기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서, battery 충전이 문제가 되었을 것임.

한국인 중에, 케추아 어를 배운 사람이 있을까? 직접 잉카인 마을에서 케추아어를 사용하면서, 지내본 사람이 있을까? 생활은 상상초월.

물론 도시에서만 자란, 내가 견디기 힘든 시골생활도 있었지만, 그들만의 아주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도 있었고, 아주 나쁘다고만 할수도 없지만, 오지의 가장 위험한, 여러가지 예방주사를 맞고, 모기에 한번 물리면 열병으로 죽을수 있다는 , 지속된 공포감도 함께 갖고서 생활.

어린아이들 중에, 갑자기 열이 오르면서, 앓다가 죽는것을 보게되는데, 우리가 가져간 비상약을 다 사용해도, 열은 내리지 않고서, 죽어가는데, 참..... 지형이 험하다 보니, 어른 아이 할것없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것도 어렵지 않게 봄. 죽음이 항상 옆에 있기에, 원주민들은 하루 하루 생활을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들이 하루를 맞이하는것과는 다름.

그들이 좀도 도시로 나와서, 문화 생활을 하면 된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지만, 그들은 몇백년인지, 몇천년을 살아온 지역을 떠나지 못함. 물론 그들은 말로만 전해지지, 글이 없었기에, 그들의 역사도 거의 기록이 없고, 스페인 정복자들이 와서, 스페인정복자의 언어로 기록한 역사만 남아있어서, 그 역사가 다 진짜인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많음.

한국도 옛날엔 하도 굶주려서, 아침 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 가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케추아 국민학교 1,2학년 교과서에, 오늘은 A 가 학교에 안나왔습니다. 동생이 어제 갑자가 잃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B가 학교에 안나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기 때문입니다. 몇달전에 C 의 삼촌이 떨어져서 죽은 절벽에서, B 의 할아버지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 절벽길을 갈때 , 몹시 조심해야 합니다. .... 이런 문장이 있는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는데, ... 마치 공포 소설을 쓰는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상황이 아주 자주 반복이 되기에, 꼭 알아야하고, 자주 쓰는 문장이다보니, 국민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배워야 하는 문장인 것이 현실.

근데 너무 슬프더라고. 2차례의 필드 스터디가 끝나고서, 돌아오는 길에, Machu Picchu에 들려서 관광할 기회가 있었으나, 관광할 기분이 전혀 아니어서, 들리지를 못했슴.

미국팀으로 갔지만, 동양인인 나를 아주 신기하게 보았는데, 물론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나, 동양이라는 나라를 전혀 알지 못했고, 외국인은 스페인인과 미국인만 알고있었슴.

잉카인들이 도시로 나와서 사는 지역이 있고, 페루나 볼리비아의 원주민만 사는, 특별한 보호 구역은, 볼리비아나 페루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들어가는데, 우리는 당연히, 미국정부와 UNESCO 의 지원과 보호아래, 특별 허가를 받아서 들어간 것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혼합이 되었다고 해야할까.... 철기시대에도 못 이루는 생활을 하고 있기에, UNESCO 의 보호를 받고 있었슴.

Machu Picchu 는 반드시 여행을 하고 싶은데. 그래서 거의 까먹은 Quechua 어도 조금씩은 다시 공부하고 있는데, 남미 여행의 기회가 올런지.

더 원주민 보호구역이었던 곳은, 브라질의 아마존강 유역에, Yanomamo 라는, 구석기 시대의 생활로 사는 원주민 지역에 탐사 나간것. 부족마을엔 전염병 감염의 위험 때문에 직접 들어갈수는 없었고, 한 70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base 로 두고서, 마을에 카메라를 보내서, 실시간으로 마을 원주민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마을 구경을 시켜주고, 대화도 나누고 하면서 , 그들의 생활을 보여 주었는데, 우리가 베이스로 삼았던곳도 엄청나 오지라서, 끊임없는 야생 곤충에 물리지 않으려는 공포감과 함께 생활.

미국에서 한달정도, 기초 야노마모어를 공부하였기에, 기본적인 인사와 대화는 야노마모어로 하였기에, 원주민들에게 더 받아들여졌는데, 브라질 정부 관계자는 포루투갈어와 영어로 우리는 당연히 영어로 모든 자료를 수집 보관. 난 비록 1주일 정도 였지만, 많이 배웠고, 석기시대로 살고 있는 , 비교적 많이 공개된 아마존 원주민이어서, 프랑스, 독일등의 연구팀도 우리의 탐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슴.

한 70킬로 떨어져 잇다고 해도, 아마존 밀림길로 70킬로 라서, 길이 엄청나게 험했고, 그들의 풍토병이 우리에게, 혹은 우리의 풍토병이 그들에게 전염될까봐, 그 이상의 접근은 절대금지. 하지만 허가가 되었어도, 못 갔을 것임. 우리는 브라질 정부의 보호아래 정부의 안내자가 있었고, 미국정부와 UNESCO가 우리의 안전을 브라질 정부에게서 확답을 받았기에, 비교적 안전했지만, 허가없이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와도, 찾을 방법도 막을 방법도 없는것이 현실이지만, 또한 아마존 밀림에서 살아 남기도 힘든것이 현실. 그래서 우리가 베이스로 있던 곳의, 브라질 정부 경호원과 안내원들은, 어디에서 백인시체 발견되었다 하면, 수습하러 나갔다오곤 했다면,

경호원이 우리들보고,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 경고나 조언을 상당히 무시하는데, 너희가 독자적으로 행동을 하여도 자기들이 막을수는 없지만, 결과는 저렇게 아마존 밀림의 시체로 돌아오게 된다고 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세히 보여줌. 그냥 사람 죽은것이 아니라, 무슨 동물에게 먹히고, 각종 벌레가 먹고, 써고, 부패해서, 온전한 사체가 없었는데, 진짜로 아주 강력한 경고.

고립된 신석기 시대를 사는 원주민들은, 배고프면 숲속에 들어가서, 바나나 따먹고, 도마뱀이나 원숭이를 잡아먹고, 강가에서 생선이나 올챙이 뱀을 잡아먹고. 농사라는 것을 모르기에, 신석기 시대인이라고 하는데, 배고프면 나가서 사냥하고, 그외엔 멍하니 마을에서 지내니까, 그들의 언어엔 음담패설이 반 이상.

그 마을의 추장격인 사람은, 불을 지필수 있는 사람. 어쩌다가 한 가정에서 , 부인이 실수로 불씨는 꺼트리자, 남편이 죽을듯이 패는데, 보고 있기에 너무 처참한데,... 물론 실시간 카메라를 통해서 였는데, 그 처참한 모습을 안볼수는 없었고, 우리는 말로 그 남편을 달래느라고, 계속 보면서 설득을 해야 했는데.... 그날 밤, 우리 팀원들은 아주 심한 trauma 생겨서, 잠을 제대로 잘수가 없었슴.

안내원 말로는, 우리 카메라가 없었으면, 그날 패서 죽이고서, 다음날 새장가 들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참. 그냥 성냥을 사용하면 되는데 하는것이 우리 생각이지만, 원주민의 생활에 직접 변화를 주려하면 안된다는 것이, 인류학 탐사의 원칙. 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자연 탐사의 원칙.

물론 우리가 실시간 카메라를 통해서, 때리는 남편을 설득하려 한것은, 그들의 생활에 참견한것이 되어서 , 나중에 서면으로 조사를 받았는데, 부인을 때러서 거의 죽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수 있는냐는 것이 우리의 자술서였슴. 그 부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 소식을 모름. 더 정화힉는 안내원들은 알고 있지만, 우리에게 안 알려 주었던것으로 보아서, 죽었기에 안알려 준것 같음. 살았으면, 잘 지낸다고 알려 주었으리라 봄. 죽었으니까, 모른다고 했을것임.

나무와 야자수 나뭇잎으로 지붕을 한 집에, 조그마한 불씨가 온기를 주었고, 잡은 생선을 뎊혀서 먹을수 있었는데, 그 불씨가 없으니, 춥고, 생선을 뎊혀 먹지 못하고 날로 먹어야 되니 화가 났겠지. 거기에댜 불을 필줄 아는 추장이 다른 마을로 외출중이라서, 며칠후에 돌아올지 모르니, 화가 더 났을 것임.

그나마 우리는 아주 특별하게, 원격 실시간 카메라 사용이 허용된 경우였기에, 문명의 기기가 조금씩, 그 마을에 들어가고 있었슴. 지금은 훨씬 많이 개방되어서, 축구팀 티셔츠가 아주 인기라고 하던데, 그 당시는, 다들 벗고 생활 했었는데...

거 멋진 경험을 얘기해 주고 싶지만, 삶과 죽음이 눈앞에서 오가는 것을, 너무 쉽게 목격을 하게 되는것이, 오지 탐사임.

흔히들 파리목숨이라는 말을 하는데, 오지로 가면, 그 원주민들은 진짜로 파리 목숨을 살고 있는것을, 너무도 쉽게 보게됨. 그래서 난 20대이후로는 너무 오지 탐사는 안하게 되었슴. 감정적으로 견디기가 힘들었슴.

또한 그들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에 지배당한 피지배계급이라서, 더 학대를 받음.

Swahili어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아프리카어인데,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가 영국, 프랑스, 독일, 포루투갈, 이태리, 네덜란드 등의 식민지 국가여서, 프랑스어가 절대적으로 잘 통하고, 그 다음이 영어. 그리고 상당수 국가가 이슬람국가여서, 아랍어가 가장 장 통했슴.

그래서 나도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다른 언어도 조금씩은 배워서, 기본 회화가 가능했던데다가,

아프리카 여행전에, Swahili 어와, Hausa 어를 조금은 배워서, 기초적인 대화는 할수 있어서, 원주민들하고, 교육을 받았으면, 영어나 불어로, 아니면 조금아는 아랍어나, 스와힐리어나 하우사어등으로, 지역 원주민들과 대화를 시도하면, 아주 쉽게 받아들여짐.

동양인이 자기들말을 조금이라도 하니까, 신기해서 받아들여지지만, 반드시 편한것은 아니었슴. 하지만 난 많은것을 배우게 되었슴. 80년대 후반이었지만, 1주일간 사하라 사막 여행을 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게에 살게 되었슴. 원주민들은 구석기에서, 철기시대까지 살고 있었는데, 탐사관광을 간 내가, 모든이의 관심의 중심이 되어 버렷씀.

사하라 사막을 낙태로 여행을 하는것도, 엄청난 운치가 있지만, 코끼리로 사막을 여행하는 것은, 진짜로 운치가 좋았슴. 지금은 금지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는 , 워낙에 여행자가 없던 시절.

동양인인 내가, 시내에만 나가도, 다들 신기하게 쳐자 보았슴. 그래서 인기 배우나 가수가 어떤 관심을 대중에게서 받는지, 직접 경험을 해보게 되었슴.

아프리카도 풍토병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는데, 매일 먹어야 하는 여러 종류의 약때문에, 더 오래 있고 싶어도, 너무 독한 약에, 더 오래 잇을수가 없었슴.

먹는것도 시원치 않은것이, 무더위에 몸이 감당을 제대로 못해서, 힘이 없었고, 원주민들은 내가 너무 신기하니까, 대변을 보고나면, 다들 구경하면서, 색이 어떻다, 모양이 어떻다, 냄새가 어떻다 하는데.... 나이 대변을 남에게 보여주는것은 엄청나게 불편한데, 사막에 제대로된 화장실이 없으니까, 적당히 밖에서 싸야 되고, 그러면 호기심 많은 원주민들이 와서, 내가 흙으로 다 덮기전에 와서, 일부를 "맨손으로" 퍼가서, 주변 원주민들과 함께, 품평회를 하는데...

약간의 원주민 언어를 배웠기에, 어떤 말을 하는지, 대충 알아 듣기에, 색깔이 어떻다느니, 냄새가 어떻다느니, 모양이 어떻다느니, 덜 딱딱하다느니 하는 말을 알아 들으면서, 엄청나게 불편했슴. 그리고 제대로 먹지를 못하고서, 몸이 않좋은 상태에서 대변을 보니, 내가 보아도, 이상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원주민 들은 아주 태연하게, 평가를 하니....

그리고 내가 싼 똥을, 그냥 맨 손으로 가져 가는데, 대부분의 아프리카 원주민은 동물, 특히 소의 배설물을 진흙과 섞어서 으깨서, 집의 벽에 바르는것이 일반적. 그래야 벌레가 집으로 몰려드는것을 막을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원주민 마을에서는, 내가 싼 대변을 빨리 손으로 가져다가, 자기네들끼리 뭐라 하더니, 한참 웃더니, 진흙과 섞어서 벽에 발라 버렸는데,

얼마후에 보니, 그 지역 원지민들이 싼 대변은, 거의 다 회색..... 근데 내것은 짚은 고동색이라서, 소들의 대변과 색이 같았슴. 그래서 그들이 아주 신기하게 보았고, 소똥과 함께 섞어서, 벽에 바르는데 사용. 내가 싼 대변을, 맨손으로 가져가는 그들을 보고서, 너무도 심한 감정이 상했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슴.

오줌을 누어도, 색과 냄새가 다른데, 먹는 음식이 달라서일 것이라고, 안내원이 설명을 해 주었는데, 오줌나오는곳에 관심을 두는것도, 나의 대변과 소변에 관심을 두는것도, 엄청나게 나에게는 불편했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것임.

대변과 소변을 보는데, 사생활이라는 것은 없고, 적당히 자리 잡아서, 주위에 누가 있을때 보아야함.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 주변에 사람이 없을때, 혼자서 볼일을 보려 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벌레, 뱀, 야생동물에 공격을 당해서 치명상을 당해서, 죽을수가 있기에, 반드시, 주변에 원주민들이 있어서 경계를 설때 , 볼일을 보아야 함.

창피하고, 불편한 것보가는, 생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

아프리카 탐사에서도, 언어의 발달과, 그들의 그림등을 연구하는 것이 주된목적. 하지만 너무나 열악한 자연환경속에서 살아가기에, 탐사 다니는것도 몹시 위험.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은, 구석기, 신석기 시대로 살고 있지만, 도시로 나오면, 유럽의 식민지시대에 개발된 도시라서, 원주민상태로 사는 것은 거의 못보고, 교육을 받았으면, 프랑스어나 영어도 아주 잘하고, 도시의 간판도, 영어나 프랑스어와 아랍어로 간판이 쓰인 경우가 대부분. 80년대, 90년대 초반반 하여도, 아프리카의 대도시는 , 아랍어 간판만 없으면, 건축양식이나, 생활 스타일이, 유럽의 도시와 다를바가 없었슴. 여행 사진을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

같은 나라의 아프리카 사람들 끼리도, 엄청난 빈부 격차를 스스로 없애려고 하지를 않기에, 외국에서 아무리 원조를 해주어도, 부자들 배만 채우지, 석기시대를 사는 원주민들에게는, 단 1원도 가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 그래서 원조 기부를 할 필요가 없슴.

Morocco 는 몹시 이국적인 분위기가 좋았는데, 모로코 북부는 스페인어가, 그외는 프랑스어가 아주 잘 통했고, 아랍어가 표준어였기에, 영어를 전혀 안하고,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만 사용하면서 , 다녔던 경험도 독특했슴. 즉 모로코 사람중에, 프랑스어나 스페인어가 아주 유창한 경우는 많지만, 영어가 유창한 사람은 별로 없기에, 나도 오히려 더 편하게 지역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 받을수가 있었슴. 거기에다 약간의 아랍어도 하였기에, 지역 주민들이 섣불리 무시 못하게 되었는데, 그런것도 나에게는 편한 여행이 될수도 있었지만, 슬픈 모로코 역사의 한 부분.

프랑스의 식미지 였었기에, 지배자의 언어, 많이 배운자의 언어, 가진자의 언어인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면, 지배당하는자, 덜 배운잔, 별로 가지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가 죽어서, 섣불리 바가지 씌우거나 무시하지를 못함. 거기에다가 내가 배운 문어 아랍어를 조금 하였기에,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만 아는, 문어 아랍어를 몇마디 하니까, 아무리 외국인이더라고, 섣불리 무시하지 못함.

특히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나 다 무시하기에, 영어을 안쓰는것이 더욱 도움이 됨.

한국 관광객들, 모로코에 가서, 어설픈 영어로 다니면, 관광객에게 바가지 씌우려고 하는, 장삿꾼들과 사깃꾼들에게 나쁜 경험만 하고 오게됨.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와 아랍어만 사용하면서 다니면, 영어만 사용할때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됨.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영국 식민지가 아니었던 나라에서는, 대부분 프랑스어가 제1언어로 사용되기에, 즉 교육을 받은, 상류층이기에, 대하는 것이 다름. 그래서 영어 통역과 다니면, 무시 당하고, 바가지 쓰기가 쉬움.

통역들도, 관광객이 바가지를 쓰더라도, 자기나라 사람이 돈을 벌고, 관광객이 돈을 더 쓰게 하는 것이라서, 장삿꾼의 바가지에 별로 신경을 안씀.

외국 여행중에, 그들이 영어건, 프랑스어건, 독일어건, 스페인어건, 아랍어건, 그들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를 내가 다 잘하지는 못해도, 대충 알아 듣는것을 안다는 이상, 나에게는 섣불리 뒷다마 칠 생각을 못함. 높은 교육뿐 아니라, 자기나라 정부의 높은 자리에 끈이 있을수 있기에, 조심을 하게됨.

모로코는 더 자주 가보고 싶지만, 80년대 후반 이후로는, 다시 가볼 기회가 없었슴. 모로코의 .Fez 시만 철저히 구경을 하면, 중세 이슬람세계 경험을 다 할수 있다고 봄.

Egypt 에는 갔었지만, 피라미드 구경은 전혀 못하고 왔는데, 아쉬움... 이집트에서도, 프랑스어만 사용하면서 지냈는데, 이집트인 친구들과 모여서 매일 술마시면서 지냈던 것은 , 아주 좋은 추억. 그 친구들을, 수년후 미국에서 만나서, 피자집에서 맥주 마시면서 , 영어로 대화를 하려니, 마치 새로이 환생을 해서, 다시 교류하게 되는것 같은 느낌.

내가 지역언어를 모르는 나라는 방문을 안햇다고 했는데, Ethiopia 가 이태리의 식민지였던 적이 잇어서, 이태리어가 잘 통하는 나라. 그래서 에티오피아가, 625참전 16개국중의 하나이기도 하엿지만, 이태리어가 잘 통해서, 잠깐 방문했던 나라. 리바아도 이태리의 식민지 였었는데, 그 당시는 테러를 지원하는 나라여서, 미국인은 방문금지.

Kenya 의 수도 Nairobi 는 , 완전히 영국의 도시 같았슴. 영국의 식민지 였다고, 영국식 영어를 사용하는데, 미국식 영어 사용한다고, 은근히 나의 영어 발음을 깔보는 , 흑인들을 보면서, 식민지국 출신이 뭐 그리 잘났다고 하면서, 난 속으로 그들을 깔보았슴.

케냐의 공영어가 영어와 Swahili 어. 스와힐리어를 아는, 미국 여권을 갖은 동양인을 일부 케냐인은, 어덯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슴.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으나, 영국의 식민지였고, 가장 서구화 되었다고, 이상한 긍지를 갖은, 수도 나이로비의 시민들. 미국에서 간 사람은, 몹시 서구화된 도시라서, 아주 편하기는 하였슴. 다만 케냐어화된 영어 단어를 이해 못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였슴.

Namibia 는 사진작가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 아프리카의 국가인데, 과연 이번 생애에는 가볼수 있을런지. 코비드로 2년이상 여행을 못하게 됨으로써, 아프리카 여행의 기회는 다시 없을것 같음.

고대 알타이어 연구를 하고, 알타이족의 고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에스키모 원주민어도 기본을 공부하고, 아메리카 인디안의, 나바호어와 호피어도 조금 공부를 하였는데, 미국 서부는, 나바호가 대부분이고, 약간의 호피들이 살고, 동부지역엔, 체로키가 대부분인데, 내가 서부에서, hiking 겸 .camping 여행은, 인디안들의 언어와 암벽화와 거주지인 pueblo 를 탐사하는 것이 목표인데, 지난 15년을 다녀서,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얻었는데, 워낙에 개발이 안된 오지라서, 자연환경의 재해의 위험이 커서, 난 반드시 지역 기관에 등록을 하고 가는데, 항상 권하는 것은, 혼자니까 가지 말아라 ...... 그래도 항상 갔슴.

미국 인디안들은, 앞으로 100-150년이면, 자신들의 문화가 다 사라지고, 언어도 다 사라지리가 에측함. 그래서 내가 조금 아는, 나바호어나 호피어는, 젊은이들은 모르고, 노인네들만 아는 정도.

그러니 무슨 탐사가 제대로 되겠나.

현실은 내가 원주민 마을에 들어가면, 원주민 자치회에서 , 방문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외부인을 완전히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서, 허가를 받고서도 그냥 나오는 경우가 많고,.... 또한 원주민들의 생활이 별로 좋지가 않아서,... 성인 남자 혼자인 내가 가면, 매춘녀를 찾는줄 알고서, 여러가지 제의가 오는데,.... 전혀 매춘을 할 마음이 없는데, 그 마을의 미래가 걱정이 될 정도....

몇몇 경우는, 그냥 보내 줄테니,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교에 다니게 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슴. 예쁘기는 해서, 약간 혹하기는 했는데, 그럴수는 없었는데, .. 그들이 게속 그 마을에 산다면, 교육의 기회도 없고, 매춘만 하면서 살아야 할것 같았슴.

인디안 마을도, 부자 마을은, 2년제 대학까지 세웠지만, 어떤 지역은, 국민학교도 50킬로나 떨어진곳에 있어서, 통학자체가 힘들어서, 집에서 노는 국민학생도 많은곳도 있었슴.

에스키모 마을은, 미국 Alaska 지역의 Inuit 마을과, 핀란드쪽의 에스키모 마을이었는데, 자신들의 고유언어가 별로 유지되지도 않았고, 알라스카 지역은 영어를 쓰고, 미국화된 마을이었고, 핀란드 북쪽은, 러시아화 되어 있어서, 기간도 짧았지만, 별로 생산적은 아니었으나, 너무도 한국사람과 똑같이 생긴 모습에 몹시 놀았었슴.

에스키모인들 모여 앉은 모습은 마치, 지방의 식당에 동넨 사람들이 모여 앉은 모습과 똑같을 정도로, 모습만으로는 이질감이 전혀 느겨지지 않았슴. 근데 대화를 하게되면, 영어로 하게되었으니.

원래는, Greenland 의 Lapland 에 가려 했으나, 허가를 못 받아서 못같는데, 알라스카의 에스키모들은 대부분 알콜중독에 마약중독. 건강한 가정이 없어 보였슴. 고대 알타이 족들이 , 시베리아에서 출발하여, 한반도를 거쳐서, 태평양의 북쪽의 얼음 덩어리를 거쳐서, 미국 대륙으로 이주를 햇으리나는, 학술적인 자료를 얻기를 원했으나, 나의 탐사방식으로는, 불가능해 보였고, 완전히 현대화된 생활에 남은 자료도 없고, 글이 없었기에, 기록된 역사도 전혀 없고.

결코 친절하지 않은, 아주 험악한 주민들의 태도에, 외부인이 머물면서, 할술연구를 하는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이니, 난 감히 탐사를 더 할 생각을 못하게 됨. 모든 가정에 엽총이 몇자루씩 있기에 , 언제 총맞아 죽을지 모름. 워낙에 할일이 없다보니, 주민들끼리 아주 사소한것에도 시비를 걸어서 , 싸우면서 시간을 보내고, 술과 마약에 쩔어서, 화풀이를 함. 그러다가 총질을 하고. 외부인은 정말로 조심해야 함.

하지만 흰 눈속의 있는 에스키모인 집은, 몹시 동화적임. 그 풍경에 마취가 안될수가 없을 정도이지만,

막상 마을에 들어가면, 온통 개똥과 오물 투성이. 처음엔 그런 오물을 안 밟으려고, 몹시 조심해서 걸어도, 10-15분 걷다보면, 신발은 오물로 더러워지고, 그후로는 아주 쉽게 적응이 되는 , 나 자신에 아주 놀라가 됨.

신발/장화에 묻은 똥 생각에, 다른 생각을 전혀 할수가 없다보니, 학문적인 탐사를 할 두뇌가 남아있지 않음. 빨리 나가야지 하는 생각뿐. 몹시 춥기 때문에, 냄새도 얼어서, 냄새는 별로 안남.

에스키모 마을은 워낙에 오지라서, 상수도 하수도 시설이 없슴. 물통을 받아다가 식수를 마시고, 샤워하고, 용변은, 화장실에 커다란 통에, 화학약품을 넣어서, 대변과 소변을 중화시키는데, 그래도 냄새가 심해서, 에스키모인집에 들어가면, 집안에 아주 심한 똥 냄새에, 비위가 아무리 강해도, 외지인은 헛구역질을 하다가 , 토하게 됨. 에스키모들은 익숙한 냄새라서, 반응이 없슴.

그래서 집에 초대해 주는것은 고맙지만, 그 집에 들어가서, 또 헛구역질 하다가 토할것을 생각하면, 초대해줄때 두려워짐. 나야 학술조사단의 일원이라서, 매일 다른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 휴... 생각 하기도 싫음. 근데 집밖은 너무 추움.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추위.

멀리서는 , 흰눈에 쌓인 동화적인 집들만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길의 까만것은 모두 개의 똥들.

에스키모 지역에 가서, 후회를 안햇다면 거짓말이고, 정말로 후회하고, 빨리 문화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슴. 그래서 Alaska 지역은, 원래 한달 계획을 세우고서 갔다가, 일주일만에 대도시로 돌아왔슴.

인도도 한달계획으로 여행을 갔다가, 일주일만에 되돌아왓고,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슴.

중국의 오지는, 너무도 많아서, 80년대 중반부터 영해/탐사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는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갈수 있는 지역이 많았슴. 조선인이 많은 여변지역도, 허가를 받아야만 갈수가 있었던 시절이었고, 그 당시 내가 백두산 여행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 한국 중앙일보의 기자였던 선배가, 천지 사진을 찍어오면, 그 당시 시세로 30만원 주겠다고 하였는데,

이틀에 걸쳐서 갔지만, 날씨가 나빠서, 천지 구경은 못했슴. 지금은 우리가 최고로 올라갔던 곳과 천지사이에, 버스 정류장이 생겨서, 버스로 쉽게 올라가지만, 예전에는 4시간을 등산을 해서 올라가야, 천지에 닿을수가 있었기에, 지금 기준으로 보면, 쌩고생을 한것 같음.

그 당시는 , 연변지역 관광 허가를 받아도, 갈수 있는 지역은 제한적이었는데, 그 지역을 벗어났다가, 공안에 걸려서, 추방당했슴.

그후로 티벳에서도 2번 추방을 당했는데, 티벳인 독립 시위가 있을경우, 외국인은 호텔에 갇히는데, 난 티벳어를 조금했기에, 티벳인들과 직접 어울려 다녔기에, 외국인 출입금지 지역에 얼마든지, 티벳인 옷을 입고서, 티벳인들과 갈수가 있었는데, ,결국엔 잡혀서, ... 티벳인 모두가 독립을 원하는것은 아니고, 중국인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티벳인도 있어서, 중국 공안에 신고 당해서, 잡혔었슴. 여권 빼앗기고, 그대로 호텔에 갖혀 지내다가, 비행기로 청두로 갔다가, 홍콩으로 강제 출국. 그렇게 두번이나 강제 출국 당했었슴.

80-90년대에는, 많은 오지를 , 완행버스를 타고서 탐사 다녔지만, 2000년대가 되니까, 고속도로가 많아져서, 훨씬 빨리 이동을 할수가 있었는데, 2000년대 후반부터는, 고속철도 늘어나서, 지방 이동이 훨씬 빨라 졌는데, 80-90년대에는, 허가를 받아야만 갈수 있던 지역이, 그후로는 거의 다 개방이 되어서, 착찹한 느낌이 들었슴. 그리 힘들게 가던곳은, 10-20년후에는, 너무도 쉽게 가니까, 괜시리 옛날에 헛고생을 하였나 하는 , 자괴감이 들 정도.

중국 변방의 많은 오지 마을은, 소수민족들이 중국에 지배당하여서 사는 곳이기에, 중국어를 사용하면서 마을에 들어가면, 환영을 못받는 경우가 많은데, 소수 민족이 엄청나게 많은 중국이기에, 그 모든 소수민족의 배경에 대해서 알수도 없어서, 그냥 대충 다녀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티벳어, 몽고어, 만주어, 위그르어, 카자흐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주 기본에서,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한 정도여서, 지역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제한적이지만 편하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중국공안은 더 위험인물로 간주해서, 제대로 원하는 만큼 다닐수는 없었슴. 중국의 경우는, 소수 민족의 언어를 안다는 것이, 오히려 장애물로 왔고, 특히 티벳 지역에서는 아주 여러번 쫒겨 났슴. 외국인이 자기들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더 거부감을 줄뿐, 친밀감을 주지 못하는것이, 중국에서의 소수민족들의 태도.

위구르 지역은, 이슬람이라서, 생긴것이나 생활등이 몹시 달랐는데, 조금 배운 위구르어를 안다는것은, ,더욱 거리를 멀게 하였슴. 마치 나를 중국인 첩자로 보는듯 하였슴. 그래도 옛날에는 구경은 잘할수 있었슴.

내몽고 부근지역에 갔을때, 혼자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관광객티가 확 나서였는지, 주변 중국인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는데, 부근에서 일하던 몽고인 노동자들이, 당연히 아무도 못알아들을줄 알고, 자기들끼리 몽고어로 소곤거리는데, 저 관광객이 혼자니까, 저쪽 길로 가면, 자기들 셋이서, 나누어서 길을 가면서, 정신을 헷갈리게 한다음, 가방을 날치기 하자고 얘기를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 주위에 외지인/관광객 같아 보이는 사람은 나 하나뿐,... 나를 날치기의 target 으로 둔것 같았는데, 그 몽고인들은, 몽골어를 아는 사람이 주위에 없으려니 했지, 미국에서 관광간 한국인이, 몽고어를 다 알아 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다 알아 들어서, 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피해 갔지만, 지역의 몽고어를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기껏 나를 강도질의 대상으로 삼는 몽고인의 몽고어를 알아 들었다는 것이 , 몹시 심한 괴리감을 갖게 하였슴.

몽고어를 배운 목적은, 고려 시대와 같은 시기의 언어에 기초를 두었기에, 한국어의 어원을 밝히고, 고려어를 추측하는데,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하는 기대감에서 공부를 한것이었는데, ... 어쨌건 몽고어를 알아 들어서, 강도당하는 것을 피하기는 하엿지만, 저런 날치기들의 언어나 이해를 한다는것에, 그 당시 엄청난 회의감과 괴리감이 들었슴.

어떤 나라의 언어를 배우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고, 그래서 그 나라의 문화나 사람에 대해서, 몹시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데, 외지에서 기껏 , 강도들의 대화나 알아 듣고.... 결코 반갑지 않았던 몽고인들....

내가 다녔던 여러 경험에 비하면, 실제로 여행해본 국가가 그리 많이 않은데, 내 주위의 친구중엔, 100개국을 다녔다, 120개국을 다녔다 하는 경우가 꽤 되는데, 난 자세히 세어보지는 않았으나 , 그수의 반도 안될텐데, 여러번 언급 했듯이, 그 지역 언어를 모르면 여행을 별로 안했기에, 유럽에서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에 집중해서 여행을 하다보니, 다른 많은 유럽국가를 다닐 기회는 없었으나, 귀머거리, 벙어리, 까막눈으로 , 기념사진만 찍고 오는 여행은, 전혀 안하였슴.

그래서 어느 곳으로 여행을 가건, 첫날엔, 그지역의 지도와, 일간지 한두개를 사서, 대충 어떤 뉴스가 있는지, 분위기를 파악하고, 관광안내소에 들려서는, 영어로 외국인 위주로된 관광코스가 아닌, 지역 사람들이 즐겨가는 유적지를 찾아서 다니고... 지역 음식을 먹고, 지역 술을 마시고, 지역 버스와 전차를 주로 타면서 다니면, 전체적으로 여행을 할수 있는 나라도 적고, 여행하는 지역도 제한 되지만, 여행 기간은 늘어나는데, ... 그렇게 더 자세히 대충 흝고 가는 여행보다는, 마치 내가 그 지역 체류자 같은 느낌으로 , 다녀여 더 보고 배우는 것이 많음.

여행하는 스타일이 달라서, 반드시 내 방법이 최고라고는 안하더라도,

영어도 안되면서, 한국어 가이드만 따라 다니면서 , 기념사진만 찍고오는 여행을 하며는, 절대로 경험을 할수 없는 여행을 내가 했다고, 너무 허구적이라는 자세는, 절대로 고쳐야 함. 한국밥, 한국반찬, 소주를 잔뜩 싸가서, 여행지에서는, 한국음식만 먹고, 저녁때는 고스톱으로 시간을 때우는, 한국 관광객들이 대부분. 그렇게 라도 여행을 하려면, 그건 그들의 선택이고, 나의 선택은 전혀 아님.

해외 여행을 가서, 한국 식당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상관. 한국음식점에 가려고 , 해외여행을 간것이 아닌데.

십몇년전에,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를 한달 여행을 한적이 있었는데, 기초 태국어는 배웠기에, 말이 통하는 태국에만 2주를 지내서, 다른곳 여행이 짧아졌고, 버마 여행을 못갔는데, 캄보지아 , 라오스는, 일반관광객 상대는 다들 영어로 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프랑스의 식민지 였기에, 관광분야 종사자가 아닌, 일반인중에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승려들은, 식민지시대의 잔재로, 영어는 못해도, 프랑스어가 유창한 경우가 많아서, 난 영어보다, 프랑스 사용하면서, 지역 사람들과 더 편하게 대화를 할수 있었슴. 캄보디아어, 라오스어까지 배울 여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프랑스어 사용하면서, 여행을 더 알차게 할수 있었슴.

언급했지만, 아프리카에서도, 식민지배자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편하게 여행을 하였는데, 사실 지역사람들에게는,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의 경우엔, 더 지역 사람들과 대화를 할수 있는 장점은 있슴.

예로, 일제시대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일본어가 아주 잘 통했기에, 서양에서 조선에 관광온 경우, 한국어를 전혀 모른다고 하여도, 일본어를 잘했다면, 아주 편하게 여행을 할수가 있었을 것임. 조선인에게는 슬픈 현실이었겠지만, 일본어를 잘 하는 외국인에게는, 아주 편한 여행 방법.

슬프게도, 나도 현실에서는, 유럽어에 치중해서, 아프리카나, 아시아, 중동지역도 , 식민지 시대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다녀서, 편하게 다닐수가 있었슴.

그런 나라에서 식민지배자의 언어가 아직도 사용이 되는것이, 아프리카나, 중동이나, 인도의 경우, 지방 사투리가 워낙에 많다보니, 그냥 식민지시대의 통치언어를 계속 공용어로 사용할수 밖에 없는 상황때문.

중동여행 경험은, 민감한 것이 많아서, 경험을 얘기 안하는데, 중동엔 건축회사 일로, 출장을 여러번 갔었는데, 비록 내가 미국 여권으로 미국회사에서 출장을 갔어도,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지냈고, 왠지 독일어도 아주 많이 사용되어서, 영어는 별로 사용을 안했슴.

80년대초 부터, 근래까지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프랑스어가 세계의 공통어로 2-300년을 유지했엇지만, 근대와 현대에 와서, 영어에게 자리를 내준고 있다는 것을 , 직접 느끼게 되었슴.

그래서 프랑스어의 식민지엿던 나라도, 제2외국어를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바꾸어서 가르치기에, 영어가 유창하면, 그 나라에 가서, 불편함이 별로 없지만, 지역 사람들을 만나면, 제대로 영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기에, 프랑스어는 일상 생활어 였기에, 프랑스어로 지역 사람들과 편하게 대화가 가능.

엉어의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음을 실제로 느낄수 있었슴.

80-90년대에 내가 했던 해외 여행의 대부분은, 학술 탐사였고, 많은 프로젝트가 UNESCO와 Smithsonian 박물관 의 지원아래 갔기에, 진짜로, 완전히 개척하면서 가는, 탐사여행이 많았고, 일부는 기록으로 남아서, National Geographic 이나, Discovery, PBS 방송에 나오기도 함.

근데 직접 경험을 얘기해 주어도, 친구들중에도 , 전혀 상상을 못하는 것이어서인지, 설마...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고, 경험을 하는 살마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한국은 주입식으로... 오직 이거다, 아닌것은 없다.. 식으로만 교육을 받으니, 조금만 배운것에서 벗어나면, 이해도 못하고, 적응을 못하고.

근래에 가장 답답한것중의 하나가, 미국 콤퓨터에 왜 한국어 프로그램이 안 깔렸냐는 것인데, 미국에서 한국 프로그램을 깔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이해 못함.

일본에 여행을 갔는데, 콤퓨터에 한글이 안 깔려서 아주 애를 먹었다, 카톡이 안 깔렸다, 아래아 한글이 안 깔렷다등을 불만으로 삼고, 일본의 IT 기술이 뒤졌다고 하는데, 해외이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관련 비지니스를 하지 않는한, 한국어 프로그램을 깔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이해를 못함. 해외에서는 , 한국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것을 이해를 못함.

80년대 중후반에 중국 연변 지역에 갔을때는, 지금은 완전히 접근이 금지된 , 고구려 무덤에 들어가서, 벽화도 맘껏 구경하고 사진도 찍어왔었는데, 물론 입구를 자물쇠로 잠그고, 지키는 관리인이 있었는데, 그 당시 공산주의 국가에는, 확실히 뇌물이라는 것이 없어서, 현찰은 안주더라도, 미국 담배 한가치 같이 피면, 그것이 엄청난 뇌물로 변해서, 원래 출입금지였어도, 고구려 고분을 열어서, 벽화를 볼수 있었슴. 그 당시에는, 나의 학술적 지식이 짧아서, 어떤 효과적으로 자룔를 얻을수는 없었는데... 지금은 학술적으로 자료를 얻는 방법을 알아도, 외국인은 절대 입장금지.

내가 원래 담배는 안 피웠지만, 중국에 가면, 상황에 따라서, 한두가치를 같이 피게 되는데, 그것이 엄청난 뇌물의 효과를 주어서, 들어갈수 없는곳에 들어갈수도 있었는데,

중국이 자유경제 정책을 펴자, 부패가 늘어나서, 2000년대 이후로는, 중국에 가면, 일단 위조 화폐 걱정을 해야 하고, 뇌물의 액수도 엄청커져서, 담배 한까치 같이 피는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슴.

조금 삭막한 여행 결험을 적었는데, 실제로 훨씬 더 삭막하고 위험한 경험은 적지를 않았슴. 반드시 나하는 방식으로 여행을 하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한국인 관광가이드만 따라 다니면서, 기념 사진만 찍고오는 관광을 하고서는, 마치 세계를 다 본듯한 착각으로 , 다른 여행 방식을 평가해서는 안됨.

지금은 한국여권으로 갈수 있는 나라가, 미국 여권으로 갈수 있는 나라보다 많고, 한국여권으로 무비자 입국할수 있는 나라는, 미국여권보다 훨씬 많음.

하지만, 나같은 여행을 할수 있었던 것은, 미국 영사관과, 미군의 보호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고, 내가 갔던 상당수의 나라에서 , 한국인은 , 미국여권소지자가 받은 지원과 보호를 받을수가 없는것도 현실.

내가 범죄 피해를 당했을때, 지역 경찰서에 가서, 물론 지역 언어와 식민지배 언어로, 직접 상황을 설명하고, 피해 상황을 접수하고, 미국 영사관에 전화를 걸어서, 미국 영사가 경찰관계자와 통화를 하면서 , 내가 도움을 받을수 있는 것에 비해서,

한국 여행자는, 한국 영사관에 전화 걸었는데, 영사관이 전화를 안받아서, 아무런 한국 영사관의 도움을 못 받았다고 , 한국언론에 불평만 하는데.... 참...

어쨌건, 자신이 해외 여행이건, 국내 여행이건 더 즐기려면, 자신이 더 노력을 해야지, 광광가이드만 믿고서 다닐수는 없슴.

한국이 반드시 여행하기가 좋은곳은 아님. 한국의 사진사들은 다 나같은 경험을 하였겠지만, 경기북부, 강원도쪽에 가면, 왜 산에서, 동네 마을 사진을 찍느냐고, 동네 사람들이 간첩 같다고 신고를 해서, 무수하게, 기관원들에게 잡혀서, 취조 당하다가 오게 됨.

전국의 거의 모든 해변가는, 군인들의 특수 경계 지역인데, 사진사가 해수욕장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일반인은 해변가에서 기관원들에게 신고당해서 취조받은 얘기를 하면 , 거짓말 하는데, 해수욕장에 사진 주제가 별로 없고, 해수욕장 사이의 산길, 언덕, 일반인이 갈수 없는 해변가가, 해뜰때나, 해질때에, 묘한 분위기를 내기에,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는데,

동네 이장이나 가게 주인들이, 이상한 사람이 외진곳에서 서성인다고 신고가 들어가 들어가면, 군인이나 경찰이 아닌, 기관원들이, 까만 승용차에, 흰와시셔츠에 까만 양복을 입은 , 3-4명이 와서, 짐 빼앗고, 모두 조사함.

항상 20-30분 정도의 취조후에 풀려났지만, 정말로 기분나쁜 경험이고, 경기북부에 볼거리가 많아도, 강원도에도 많아도, 갈 생각을 더 이상은 안함.

자주 하는 경험담인데, 강원도 영월에 갔을때, 버스가 3시간에 한대. 그 당시는 콜택시도 그 지역엔 없어서, 2시간 걸어서, 갔는데, 가는 사이에, 식당도 몇곳 없었는데, 몇몇 동네 이장이란 사람들이, 차타고 쫒아 다니면서, 왜 사진 찍으면서 다니냐고 묻더라고. 그러면서도, ,내가 가려는 곳에, 차를 태워 주려고는 하지 않고.

그러는데, 검은 승용차가 따라 오더니, 신분증 조사하고, 짐 다 조사하더니, 그냥 가더라고. 아주 더러운 기분.

그러고서 몇년후에, 충남 아산시에 꽤 떨어진 지역의 석불을 찾아 갔는데, 버스가 없는 지역이라서 한 시간 이상을 걸어갔고, 안개가 엄청나게 심했던 날인데, 택시도 지나가지 않고. 산 중턱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오니까, 검은색 승용차에 검은 양복을 입은 기관원들이, 나를 붙잡고 취조 하는데, 하도 익숙해져서, 그려러니 하였고, 나야 순순하게 사진 찍으러 다녔기에, 숨길것도 없었고.

근데 그 기관원중 한명으, 몇년전에 영월에서도 취조를 한적이 있다고, 기억을 하느냐고 하는데, 얼굴을 기억을 할수는 없지만, 그 상황은 아주 자세히 기억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기관원은 내 얼굴과 상황을 아주 자세히 기억. 많은 한국의 사진가가 Canon 이나 Nikon 을 쓰는데, 난 Pentax 를 사용하는 것도 기억. color filter 를 가지고 다니던 것도 기억. 내 개인 손글씨요 노트와, samsung galaxy note tablet 을 갖고 다니는것도 기억. ,결코 반가운 마음은 아니나, 나의 상황을 다 기억햇고, 두번째도 똑 같은 상황.

아주 씁쓰름했던 기억.

북한산, 수락산등에, 석불탐사와 사찰 탐사를 가더라도, (난 등산만을 목적으로 간적은 없슴), 산에 오르기만 바쁘기 보다는, 적당한 곳에 홀로이 앉아서, 잡생각도 하고, 멍때리기도 하고, 항상 가지고 다니는 노트에 글을 쓰기도 하거나, 잠깐 책을 읽으면서 쉴수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무조건 올라가고 , 무조건 내려가야만 하는것이 등산.

몇몇 애국적인 등산객은, 산에 오르지 않고, 앉아서, 무엇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기만 하는 수상한 사람이 있다고 신고를 해서, .... 난 기관원들에게 붙잡혀서 취조를 당하고, 모든 짐을 검사받고 나서, 풀려난 경우도 여러번.

최악이었던 경우는, 북한산에서 였는데, 아주 편히 앉아서, 돌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데,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해서, 어떤 등산객이 절벽에서 떨어져서 다쳐서, 의료헬기가 오는가 했는데... 알고보니, 얼마나 긴급한 신고를 받았는지, 나 잡아서 취조하려고, 기관원들이 헬리콥터를 타고왔다는데,........ 왜 등산하다가, 쉬면서, 글쓰거나 , 음악듣거나, 사진을 찍으면 안되는데.

왜 반드시 식당에서만, 막걸리 사마시고, 녹두전을 먹어야 하는지. 좀 외진 곳에 , 앉아 잇으면 의심을 받아야 하는지....

미국 Arizona 주의, Grand Canyon 은 워낙에 유명한데, 캐년아래의 콜로라도강까지의 하이킹은 아주 멋지지만, 아주 험난한 코스로도 유명한데, 나도 딱 한번 완주 했었는데, 내려 가는데, 6-8시간, 올라오는데 6-8시간. 아주 체력좋은 젊은이들ㅇ, 새벽 3-4시에 출발해서, 강까지 갔다가, 그날 밤 10-12 시전에 올라오는 저력도 보여주는데..

캐년위의 전망대에서만 바라보아도 환상적이지만, 실제로 캐년 아래로 하이킹을 하면서 보는 풍경은 더욱 환상적. 하지만 코스가 너무 힘들어서, 섣불리 도전을 못함.

근데 반드시 6-8시간 걸려서, 콜로라도 강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봄. 한시간 정도만 내려가면, 두번째의 아주 좋은 전망 포인트가 있기에, 거기까지만 가서, 전망 구경하고, 등산객에게 방해가 안되는 바위에 걸터 앉아서, 싸간것 먹고, 음악도 듣고, 졸기도 하고, 글도 쓰고, 책도 읽으면서, 1-3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한시간 걸려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것도 아주 좋은 경험.

난 한번 캐년 아래 강까지 왕복 하이킹을 했는데, 너무 힘들엇고, 하지만 그후로 여러번, 1시간 아래까지만 가서, 아주 푹쉬다가 오는 과정을 여러번 반복. 체력 상태에 따라서, 30분만 내려가면, 첫번째 전망 포인트가 있는데, 거기 까지만 갔다가 와도 되고, 거기서 30분 더 내려가면 2번째 전망 포인트. 갔다온 사람들은, 다들 내가 어느곳을 말하는지 앎.

그 아래로 내려가면, 너무 힘듬.

어떤 때는, 등산로 입구에서 자리잡고 앉아서, 싸온 음식 까먹고, 노래 듣고, 글쓰고 하면서, 전혀 등산을 하지 않고, 오르거나 내려가는 사람만 구경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등산 가더라도, 몸의 상태에 따라서, 반드시 산꼭대기까지 갈 필요는 없는데,

한국에서는 그런것을 이해를 전혀 못하는 분위기.

지금 한국에서는 글램핑이 유행인데, 미국에서 2-3일간 샤워도 못하면서 , 캠핑을 하는것은, 자연을 더 가까이 하자는 의미이지, 글램핑할 돈이 없어서, 오지로 배낭하나 메고서 , 캠핑을 가는것이 아닌데, 대단수 한국의 등산객은, 그런것을 이해를 못함.

쉽게 가는 방법이 잇다는데, 쉽게 등산을 하는 방법은 없슴. 직접 힘들여서 산꼭대기에 오르지 않으면, 그 정상에서의 경험을 맛볼수가 없슴. 한국 사회가 편리함만 생각하기에, 모두가 그리 변하는것 같음.

한국이 제일 자랑하는것이, 등산로에 수세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게 잘 만든 화장실이 있다고 자랑을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지만, 제일 한심한 자랑.

미국 국립공원의 경우, 자연의 훼손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 오지 지역의 화장실은 수세식을 안 만들고, 옛날 푸세식, vault toilet 을 지금도 만드는데, 변이 쌓인 곳에는,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넣어서, 자연적으로 분해가 되게 하기에, 냄새도 심하지만, 자연을 최대한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라기에, 다들 이해.

하지만 한국은 정부관계자 부터, 그런것을 이해못하고서, 수세식 화장실을 산에 짓기에 바쁘고, 세계에서 최고라고 자랑을 하기 바쁜데.... 환경보호론자들로 부터 비난을 엄청나게 받음. 물론 아주 편한것은 사실이나, 며칠 산속의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햇다고, 아주 불편하거나, 인간이 망가지는 것은 아니고, 자연환경 보호에 , 일조를 하였다고, 마음이 조금은 , (실제로는 억지로 ), 편해짐.

미국이나 서구 유럽 국가가, 돈이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편리함을 몰라서, 등산로에 수세식 화장실을 안짓는것이 아니라, 자연 환경 보호라는 것을 , 전혀 이해 못하는 한국의 정부나, 등산 관계자나 , 일반 시민이나.....

너무 narrow-minded 되었고, 제한된 시각속에서만 사는 ,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것이 세계의 기준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격언이 한국에 있어도, 진짜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는것 같음.

어느 곳을 여행하건, 건강하게, 다치는곳이 없이 돌아와야, 좋았건 나빴건 경험을 얘기할수가 있지, 안전수칙을 무시했다가 , 다쳐서 불구가 되어서 돌아오거나, 집으로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여행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을 얻기 위한것은 변함없는 궁극적인 목적. 안전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상황에 따라서 여행 목적지에 가기를 포기하는 , 현명함도 있어야 함.

(January 11, 2022)

Copyright© 2020-2022 Daniel SW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