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267: 동대문 추억 |
내가 국민학교 2학녀 가을에 동대문으로 이사를 가서, 미국오기 전인 80년 가을 까지 살았는데, 아주 고향으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이, 주변엔 외지인이 많았기 때문. 그래도 10대를 온전히 살았기에, 많은 추억이 남았고, 특히 집에 엄청나게 좋은 도서관을 갖추었기에, 친구들도 오면, 대화를 하기 보다는, 서로가 관심있는 분야의 책을 뽑아서 읽기에 바빴을 정도. 할아버지가 젊은때 부터 모았던 책중에, 625를 거치면서 남은 책들, 그리고 아버지가 수집하고, 내가 수집을 했다기보다는, 소년중앙, 학생중아, 그리고 많은 소설집, 만화책등이 있었슴.
우리집에 방문한 친구들은, 싫어도, 내가 연주하는 기타 연주를 들어야 했고, 덩으로, pop song 이나, 포크송을 부르면, 들어야 했고... 기억을 해주면, 기타 잘 친다고 칭찬을 햇던 친구는 있었지만, 너 노래 잘부른다 칭찬햇던 친구는 없었던것으로 기억.
동네 친구는, 아주 어릴때 그 부근에 살다가, 이문동, 회기동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동대문으로 이사를 온것이기에, 동네 친구들이 꽤 있었씀. 근데 벌써, 살아있는 동네 친구는 반도 안되니.... :-(
동대문에 살면서의 기억엔, 전차이야기가 빠질수 없는데, 워낙에 어릴때라서, 기억이 희미하나, 동대문서 청랼리까지 가는 노선의 종점이라서, 지금 SF 의 전차에서 보듯이, 종점에서, 삥 180도로 돌려서, 온 방향의 반대로 향하여 가게 전차를 찾아이 , 손으로 미는데, 그럴때면, 주위의 젊은이들이, 주로 차장을 도와서 밀어 주곤 하엿는데, 국민학교 저학년생 이었던 나는, 그것이 재미있어서, 도와 주려고 하면, 국민학생은 빠지라고 하여서, 아쉽지만, 도와주지 못했던 기억이 많지. 사실 국민학생이 끼면, 거슬리기만 했겟지.
난 그 당시 전차 타기를 아주 좋아 했는데, 전차길은, 찻길 중간에 있어서, 길을 건너서 중앙으로 가야 했는데, 버스나 택시가 오다가 서야만 건럴수가 잇었는데, 오는 택시나 버스가 서지 않을까봐 엄청나게 무섭더라고. 결굴엔 전차가 없어졌지.
동대문에서는, 예전의 동대문 종합 운동장에 관련된 여러가지가 항상 기억이 나지.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동대문운동장 남쪽으로, 승마를 배우는 말타는 곳이 있어서, 내가 국민학교 5학년때인가 처음으로 승마를 하엿지. 뚝섬에 경마장이 있었는데, 왜 멀리 떨어진 동대문운동장에 말을 타는 데가 있었는지는 모르겟는데, 아뭏든 난 두해 여름을 그곳에서 승마를 하엿지.
특히 한번은, 그 승마클럽의 회원인, 미국 백인 몇이, 승마장안에서만 말을 타다가, 그 당시 간단한 영어는 알아 들엇던 정도였는데, 밖으로 나가자 하더니, 뭉을 열어서, 여럿이서 말을 탄채로, 밖으로 나가서, 동대문으로 해서 남쪽으로 숭인동쪽으로 해서, 동묘로 해서, 서쪽으로 , 황학동쪽으로 해서, 다사 북쪽으로 동대문 운동장 남쪽의 승마장으로 돌아오는 것이엇는데, 그 당시 아주 보기 드문 광경이엇겠지.
말 여러마리에 앞쪽과 뒷쪽에는 백인들이 탔고, 승마가 서투룬 어른이나 어른은 중간에서, 앞을 따라만 가는데, 길거리의 교통 경찰도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하고, 근데 앞뒤고 백인들이 당당하고 타고 잇으니까, 말을 걸지도 못하고, 우리들은 아주 당당하게, 길의 가운데로 말로 , 뚜벅뚜벅 말 발굽 소리를 시끄럽게 내면서, 아주 당당하게 갔었는데, 서울에거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거의 없지.
말을 탔는데, 높이가 높아서, 버스 운전사보다도 높더라고. 찻길을 그리 말을 타고서 돌았던 상쾌함이야..... 아마도 거의 30-40분쯤 이엇으면, 내 생애 최고의 경험중의 하나. 우리가 말을 몰고, 승마장으로 돌아왔을때, 안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미국 백인들에게 영어로 항의는 못하고, 근데 한국어로는 몹시 큰 소리가 들렷는데, 나야 국민학생이엇으니가, 나에게는 아무런 질문도 안했고, 어른들이야, 백인친구들에게 물어보라고 답을 회피하는데, 아마 백인 3명이엇던것 같은데, 아무도 감히 물어보지는 못하고...... 아주 유쾌햇던 경험인데, 직원들은 아주 고생을 했겠지.
몇년후 그 승아장은 없어졌지.
동대문 운동장 남쪽에느 수영장과 꽤 큰 공터도 있었는데, 그 공토에서는 유럽의 서커스 단이 와서, 서커스를 하고 가곤 하였고, 난 공짜표로 유럽 써커스 구경을 올때마다 하엿던 기억. 그 서커스 단들은, 테레지비에도 나오고, 지방 공연도 가곤 하였는데, 서커스단의 레퍼토리는 그때는, 50년이 지난 지금이나, 100년전이나 또같은것 같더라고.
서양 서커스단 말로, 동춘 서커스단인가, 한국의 가장 오래된 서커스단도, 그곳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였는데, 내 기억으로 중학교때. 돈을 주고 가기에는 아까운것 같아서, 천막 문 입구에서 계속 망설이고 있는데, 마지막 공연이라고 그냥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가니까, 자리는 꽉 찼는데, 서커스 내용은 똑 같은데, 전반적인 분위기는 서양 서커스단에 비하면, 몹시 구리다는 느낌. 음악도 후지고, 장비도 너무 낡았고, 서커스 단원들도 화장만 찐했지, 체격이 너무 빈약해 보이고,... 하지만, 하는 내용은 거의 같았지. 근데 볼수록 재미는 있더라고. 그래서 끝까지 다 보고 나왓는데, 보고 나오면서, 들어갈때 입장료를 안 냇으니까, 나오면서라도 낼께요 하면서, 입장료를 냇을 만큼 아주 만족스럽게 보앗던 동춘서커스단의 서울에서의 마지막 쇼.
그후로는 동춘서커스단은 지방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고 , 여러 르포 기사에서 종종 나오는데, 동대문에서가 서울에서는 마직막이라고 안나오고, 그 1-2년전으로만 나오더라고. 내가 직접 갔었기에, 확실히 기억을 하는데, 워낙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다 보니, 언제가 마직막 쇼 였는지도 기록이 희미한데, 그래도 서울에서 공연을 햇다고 하면 존재감이 있는데, 종로구 창신동 동대문운동자에서가 서울에서의 마지막 공연이라는 것은, 아주 좋은 기록일테넫, 그런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을 정도로, 서커스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진것이 아쉽더라고.
서커스단원들의 얼굴을 기억하기에, 그후로 수년간은 동춘서커스 기사가 나오면, 그들이 보엿었는데, 수년이 지나고서는 아는 얼굴이 없어지기 시작하더라고.
내가 중학교때 서울 한복판에서 동춘 서커스를 보앗다고 하면, 일부 친구는 짜퉁을 본것 아니냐고 하느데, 단원들 얼굴을 기억하기에, 짝퉁은 아니고, 일부 친구는 내가 엄청나게 시골에 살아서 동춘서커스를 본줄 아는데, 내가 직접 보았기에 다 기억. 게다가 공짜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오히려 입장료를 냇을 정도로, 아주 만족스럽게 보았는데, 서양 서커스보다, 후진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아주 재미 있더라고.
그 당시 동대문 북쪽, 동대문시작의 일부를 헐어서, 시외 고속버스 터미널을 만들어서, 지방으로 벤쯔 고속버르가 즐비햇었지. 그 당시 시내의 버스와는 비교가 않되는, 엄청나게 크고, 푹신한, 벤쯔 고속버스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난 멀리는 못가보고, 수언까지만 갔을때, 타보니, 엄청나게 부드럽고 스무드 하더라고.
친구중에, 그 고속버스 회사 사장 아들이 있엇는데, 그 친구 집엔, 본채 3층말고도, 2층짜리 별채가 있어서, 우리들이 놀러가서 술레잡히 하면서 놀기엔 최고 엿는데, 그 당시 벤쯔 고속버스가 고장이 났는데, 간단한것은 한국기사가 고쳐도, 엔진등 큰것이 고장나면, 독일에서 부품과 함께 한국에 와서, 이 친구 집의 별채에 머물면서, 고속버스를 고치다가 간다고 하더라고. 친구가 독일에서 손님왔다고 해서, 구경을 가면, 미국인처럼 생겻는데, 하는말이 영어가 아닌 이상한 말이엇던것을 기억. 독일어라고 하던데, 사립국민학교에서는 조기 교유그올 영어를 일찍 배워서, 영어는 조금 알아 들엇고, 미국에서 살다가 전학온 동창들이 많아서, 영어는 알아 들었엇지.
짧은 대학 시절엔 , 졸로에서 아무리 늦게 녿다가도, 통금에 쫒기어서 마지감 버스를 타면, 빠르면 10분이면 동대문에 도착을 하니, 외박을 전혀 안하고, 항상 집에서 잤었는데. 통금에 쫒겨서, 우리 집에서 자고 가려다가 못자고간 친구들이 꽤 되는데,..... 한숨만...
그 당시 주위엔,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옷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지. 색벽같이 일하러 가고, 저녁늦게 집에오기에, 얼굴을 아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것은,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옷가게를 여럿하는 알부자들 이엇는데, 대부분은 월남한 사람들, 그래서 북한 사투리를 아주 심하게 썼는데 , 자식 교육은 가정 교사에게 맡기고, 집 살림은 식모에게 맞겨서, 동네의 많은 또래들 집에 가보면, 가정교사와 식모들이 부모들의 역확을 대신 하는것 같아 보였슴.
그러다가 70년대 후반이 되니까, 동대문을 떠나서, 이사를 가는데, 강남 압구정동, 강남 신사동, 강남 방배동등 세 지역으로만 이사를 가더라고. 그래서 꽤 오랫도안 강남에 동이 세개박에 없는줄 알앗는데, 강북에서 현금 알부자들이 이사가면서, 아주 부촌이 되었지.
동네의 그런 알부자들의 가정을 보면서, 많이 느끼게 되는것이, 남에게 자식의 교육이나 성품을 교육 시켜서는 않된다는 것이지. 돈으로만 고용된 사람들이 아무리 순수한 마음으로가르친다고 하여도, 남일뿐. 친부모들, 친척들이 간단히 조언을 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 하지만 월남한 부모들이기에 , 친척도 앖고, 부모는 돈 벌기에만 몰두하니....... 어렸지만, 저래서는 않되는구나 하는 것을 많이 보고 배웟지. 예는 전혀 안들겟슴.
청게천에서 옷장사해서 , 준재벌급이 된 경우도 아주 많은데, 넘기 힘든 벽은 못 넘더라고.
동대문이 원래는 한양에서 바로 성벽과 붙어 있는 성문밖이어서, 성문안에 저택이 있는 양반들이, 대가족을 수용하기 위해서, 성문밖에 훨씬 큰 집을 지엇 살던 곳이라서, 대규모 한옷이 있던 곳이었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큰 저택은 여러 작은 집으로 나뉘어서 팔려나가서,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사서 살게되니, 그들의 다양한 배경 때문에, 한동네 사람이라고 느끼기 힘들어져가는 것을 느꼈슴.
겉에서 보기에는, 작은 집들이 많은것 같아도, 150-200평 되는 한옥이 꽤 되었고, 대문을 2-3개 지나서 들어가면, 마당 가운데 작은 연못과 그안에 정자가 있는 집들이 많았는데, ... 도시 계획으로 충신동에서 연건동쪽은, 쏵 다 불도저로 밀려서, 도로가 되어짐.
유명한 사람중에, 창신동에 살았던 사람들이 많음. 하지만 지금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쉬, 인도 노동자들 천지.
청계천에서 시궁창이 흐르다가, 복개 공사를 해서, 아주 넓은 공터가 생겼을때, 종종 동네 친구들과 축구공이나 야구공과 글러브를 갖고서 놀러 갔다가, 청계천 판자촌 집에 사는 , 불량배들한테, 축구공이나 야구공과 글러브를 빼앗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른들이, 불량배들한테 그러지 말라고 하지 않고, 그냥 지켜 보던 눈빛과 태도도 아직도 생생히 기억..... 누군가가 청계천 판자촌의 추억을 이랴기 하려고 하면, 난 내가 그 고셍서 놀다가 빼앗긴, 축구공, 양구공, 야구글러브 이야기를 하지. 친구중엔 자전거 타고 갔다가, 자전거 빼앗긴 경우도 있고...
승마와 동추서커스만 이야기 하려다가 몹시 길어졌네.....
(June 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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